러프 스케치 단계에서 요구하는 디테일은 모순이다

러프 스케치 단계에서 요구하는 디테일은 모순이다

러프에 디테일을 달라니 회의실에 들어갔다. 기획팀 3명, 아트팀장, 나. "이번 신규 캐릭터 컨셉 보겠습니다." 프로젝터에 내 러프를 띄웠다. 실루엣 3종, 각 20분씩 그렸다. 러프니까. 기획팀장이 말했다. "표정이 더 보고 싶은데요." "러프 단계라 아직..." "그리고 이 의상 주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디테일은 채택된 안으로 넘어가서..." "손에 든 무기도 좀 더 구체적으로요. 이게 검인지 창인지." 러프 스케치 회의가 2시간 걸렸다. 결론: 3안 다 다시. 더 구체적으로.러프의 정의부터 다시 퇴근길에 동기한테 톡했다. "러프가 뭐라고 생각해?" "빠르게 여러 방향 제시하는 거지." "맞지?" 러프는 방향성이다. A냐 B냐 C냐. 큰 실루엣, 컬러 톤, 느낌. 디테일은 방향 정해진 다음이다. 당연한 얘기다. 근데 기획은 러프 단계에서 완성본을 원한다. 표정, 주름, 장신구, 무기 형태, 심지어 "이 천 재질이 뭐예요?" 이런 질문까지. 그럼 그냥 완성본 그리라는 건데. 완성본을 3개 그리면 뭐가 문제냐. 시간이다. 러프 하나에 20분. 완성본 하나에 8시간. 3개면 24시간 vs 1시간. 차이가 24배다. 24배 시간 써서 3개 다 버려지면 어쩔 건데. 기획은 "아 이 방향 아닌 것 같아요" 하면 끝이지만, 나는 3일 날아간다.요구의 구조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봤다. 기획은 불안하다. 러프만 보고 결정하기 무섭다. "이게 완성되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 말 자주 듣는다. 그래서 러프 단계에서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한다. 완성본에 가까울수록 안심이 된다. 이해는 간다. 근데 그게 아티스트의 일을 24배로 늘린다는 걸 모른다. 아니, 알아도 "그래도 필요한데요"라고 한다. 회사 구조도 한몫한다. 기획팀장이 위에 보고할 때 러프보다 완성본 같은 게 좋다. 위에서도 "이게 뭐야, 낙서네"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 결국 아트팀이 그 시간을 다 메운다. 우리 야근으로. 팀장한테 얘기했다. "러프 기준 다시 정해야 하지 않나요." "알아. 근데 기획이 저러는데 어떡해." "기준이 없으니까 저러는 거잖아요." "다음 프로젝트 때 정리해보자." 다음 프로젝트. 언제인지 모른다. 지금 프로젝트는 계속 돌아간다.디테일의 시간 집에 와서 계산했다. 러프 3안 → 각 20분 → 1시간 수정 요구 → 디테일 추가 → 각 3시간 → 9시간 총 10시간 정상 프로세스: 러프 3안 → 1시간 선택 1안 → 완성 8시간 총 9시간 1시간 차이? 아니다. 3안 다 디테일하게 그리면, 안 쓰이는 2안의 6시간은 그냥 증발한다. 그 6시간에 다른 캐릭터 러프 18개를 그릴 수 있다. 다음 프로젝트 사전 작업을 할 수 있다. 개인 포폴을 만들 수 있다. 근데 그냥 사라진다. "아 이 안 아니네요" 한마디에. 이게 한 달에 2번, 3번 쌓이면 일정이 밀린다. 밀리면 야근한다. 야근하면 다음 작업 퀄리티 떨어진다. 떨어지면 수정 들어온다. 또 야근한다. 악순환이다. 표준이 없다 문제는 회사마다, 프로젝트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거다. 예전 회사는 러프 정말 러프했다. 막대기 인간도 통과됐다. 실루엣만 보는 거니까. 지금 회사는 러프에 음영 넣고 컬러 넣고 표정 넣으라고 한다. 그럼 그게 러프냐. 해외 아트북 보면 정말 막대기 러프 많다. 그걸로 방향 잡고, 선택된 안 하나만 완성도 높인다. 당연한 프로세스다. 근데 한국 게임 회사는 모든 단계에 완성도를 요구한다. 러프도 완성도, 1차 완성도 더 높게, 2차 완성도 더더 높게. 끝이 없다. 신입이 물어봤다. "러프는 어느 정도로 그려야 해요?" "음... 케바케." "기준이 없어요?" "응. 기획 성향 따라가." 이게 답이라는 게 웃긴다. 요청의 번역 기획이 원하는 걸 번역해봤다. "디테일 더 주세요" → "이걸로 위에 보고해야 하는데 민망해요" "표정 보고 싶어요" → "캐릭터 감정선을 러프로는 못 읽겠어요" "무기 형태 구체적으로" → "모호하면 나중에 책임 소재 애매해요" 다 이해한다. 진짜로. 근데 그럼 처음부터 "완성본 3개 주세요"라고 하면 안 되나. 러프 회의라고 해놓고 완성본 요구하지 말고. 시간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러프면 이틀, 완성본이면 일주일. 근데 "러프요" 하길래 이틀 잡았는데 "디테일이요" 하면 일주일 일을 이틀에 해야 한다. 불가능하면 야근이다. 주말 출근이다. "원래 게임 업계가 이래" 이런 소리 듣는다. 아니다. 프로세스 문제다. 선배의 조언 점심 때 선배한테 물었다. 10년차다. "형은 어떻게 해요?" "러프 요청 오면 일단 디테일하게 그려." "그럼 시간 엄청 걸리잖아요." "응. 근데 한 번에 통과되면 수정 안 해도 돼." "안 통과되면요?" "그땐... 운이 없는 거지." 허탈했다. 다른 선배는 달랐다. 7년차. "나는 진짜 러프만 줘. 막대기 수준." "기획이 뭐라 안 해요?" "해. 근데 '러프니까요' 하고 버텨. 선택되면 그때 그려." "통과돼요?" "반반. 근데 내 시간은 지킨다." 방법론이 사람마다 다르다.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중간쯤 한다. 러프보단 디테일하게, 완성본보단 덜. 그래도 "좀 더"를 듣는다. 끝이 없다. 아티스트의 책임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잘못도 있다. 아티스트가 러프를 대충 그려서 문제가 생긴 적도 있다. "이 느낌으로 가요" 했는데 완성본이 180도 달랐다. 기획이 뒤집어졌다. "러프에서 이런 느낌 아니었잖아요." 그럼 기획 입장에선 러프를 못 믿는다. "완성본 나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이 말이 나온다. 신뢰의 문제다. 아트팀이 러프로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고, 완성본에서 그 방향을 유지하면 기획도 안심한다. 근데 그게 항상 되는 건 아니다. 완성 과정에서 느낌이 바뀐다. 더 좋게 하려다 보면 원래 방향에서 벗어난다. 그럼 또 수정이다. 결국 기획은 러프 단계에서 최대한 확정하려 한다. "여기 이거 이렇게 가는 거 확실해요?" "표정은 이대로 확정이에요?" 확정은 완성본에서 해야 하는데, 러프에서 확정하려 한다. 모순이다. 회사의 시스템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러프 → 1차 완성 → 2차 완성 → 최종 완성 이렇게 4단계를 거치는데, 각 단계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러프는 뭘 보여줘야 하나. 실루엣? 컬러? 표정? 디테일? 회사가 정해줘야 한다. 근데 안 한다. "알아서 해" "상황 봐서" "유연하게" 이런 말만 들린다. 그럼 아티스트는 불안하다. 덜 그리면 "성의 없다", 많이 그리면 시간 낭비. 중간은 어디냐. 모른다. 기획도 불안하다. 러프로 결정하기 무섭다. 완성본 나오면 다를까봐. 둘 다 불안하니까 안전하게 간다. 러프를 완성본처럼. 시간이 두 배로.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러프 단계 기준을 명확히 정하고, 기획도 아트도 그걸 따라야 한다. 근데 누가 바꾸나. 위에서 안 바꾸면 안 바뀐다. 타협점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시스템 안 바뀐다. 당분간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러프 수준 미리 확인 회의 전에 물어본다. "이번 러프는 어느 정도 디테일 원하세요?" 애매한 답 오면 예시 보여준다. "이 정도요? 아님 이 정도요?" 확실히 하고 시작한다.시간 명확히 전달 "러프 3개면 하루, 디테일 추가하면 3일 걸립니다." 숫자로 말한다. 감으로 하지 않는다.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 일정에 이 퀄리티는 불가능합니다." 팀장 통해서라도 전달한다. 죽어라 하다가 번아웃 오는 것보단 낫다.러프 단계 기록 러프 보여줄 때 "이건 러프입니다. 완성본과 30% 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명시한다. 나중에 "러프랑 다르잖아요" 하면 "러프니까요" 할 수 있게.완벽하진 않다. 근데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이상과 현실 이상적으로는 이렇다. 러프는 5분. 10개 그린다. 방향 10개. 기획이 3개 고른다. 그 3개만 20분씩 디테일 러프. 1개 선택. 그것만 8시간 완성. 총 시간: 5분x10 + 20분x3 + 8시간 = 9시간 50분 산출물: 완성본 1개, 과정 명확 현실은 이렇다. 러프 3개 그린다. 각 3시간씩. 기획이 "다 아닌 것 같아요" 한다. 3개 더 그린다. 각 3시간씩. "1번이랑 4번 섞어주세요" 한다. 섞는다. 4시간. "표정을 좀 더" 한다. 수정한다. 2시간. 겨우 완성본 작업 시작. 8시간. 총 시간: 3x6 + 4 + 2 + 8 = 32시간 산출물: 완성본 1개, 과정 지옥 3배 넘게 걸렸다. 같은 결과물에. 차이는 프로세스다. 기준이 없으니까 이렇게 된다. 결론 아닌 결론 오늘도 러프 회의가 있다. 3시. 러프 3개 준비했다. 각 1시간씩 걸렸다. 러프치곤 디테일하다. 표정, 주름, 무기 형태 다 들어갔다. 그래도 "좀 더"를 들을 것 같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회사도 안다. 기획도 안다. 근데 안 바뀐다. 언젠가 바뀔까. AI가 러프를 1초에 100개 그려주면 바뀔까. 아니면 아티스트가 다 번아웃으로 쓰러져야 바뀔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3시 회의 준비한다. 커피 한 잔 더 마신다. "좀 더" 들으면 "네" 한다. 그렇게 오늘도 돌아간다.러프는 러프여야 하는데, 완성본이 되어버린다. 그 사이 시간이 증발한다.

커미션 요청을 받으면 하는 생각: '이 정도면 프리랜서?'

커미션 요청을 받으면 하는 생각: '이 정도면 프리랜서?'

커미션 요청을 받으면 하는 생각: '이 정도면 프리랜서?' DM이 왔다 퇴근하고 집에 왔다. 샤워하고 폰 켰더니 트위터 DM이 하나 있다. "안녕하세요. 팬아트 보고 연락드립니다. 캐릭터 일러스트 의뢰 가능할까요?" 이게 벌써 이번 달 세 번째다.지난달에는 다섯 건 들어왔다. 커미션 단가는 건당 30만원에서 50만원 사이. 많을 땐 80만원짜리도 있었다. 계산기를 두드린다. 한 달에 5건이면 250만원. 주말 다 써도 가능한 수치다. 회사 월급은 세전 416만원. 실수령은 360만원 정도. "이 정도면 프리랜서 해볼 만한 거 아냐?"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매번. 계산은 항상 달콤하다 엑셀을 켠다. 프리랜서 수입 시뮬레이션 파일. 이미 20번은 수정한 파일이다. 커미션 단가 40만원으로 잡는다. 보수적으로. 월 10건 받으면 400만원. 지금 월급이랑 비슷하다. 작업 시간은 건당 8시간. 주 5일, 하루 4시간씩 작업하면 한 주에 2.5건. 한 달이면 10건. 딱 맞아떨어진다. "가능한데?"여기에 상업 일러스트를 더하면 어떨까. 출판사나 인디게임팀 쪽. 건당 100만원에서 200만원. 한 달에 2건만 해도 200만원 추가. 그럼 월 600만원. 지금보다 훨씬 많다. "출근 안 해도 되고, 마감도 내가 조절하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현실은 계산기를 닫게 만든다 근데 여기서 멈춘다. 항상. 첫 번째 문제: 10건이 꾸준히 들어올까? 지금은 취미로 올리는 팬아트 덕분에 DM이 온다. 트위터 팔로워는 8000명이지만, 실제 커미션 의뢰는 한 달에 3~5건 정도. "만약 팬아트 그릴 시간이 없으면?" 커미션만 하면 포트폴리오 업데이트가 안 된다. 업데이트가 안 되면 노출이 줄어든다. 노출이 줄면 의뢰도 줄어든다. 악순환.두 번째 문제: 4대보험. 지금은 회사가 반 내준다. 프리랜서 되면 전액 내 돈이다. 건강보험만 한 달에 15만원. 국민연금까지 합치면 25만원. 그리고 세금. 3.3% 원천징수는 기본이고, 종합소득세까지 생각하면 실수령은 생각보다 적다. "400만원 벌면 실제로는 320만원 정도?" 지금이랑 별 차이 없다. 안정이라는 이름의 족쇄 세 번째 문제: 회사 이름. 지금 다니는 곳은 중견 게임사다. 포트폴리오에 쓸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 온라인 캐릭터 컨셉 아트 담당" 이 한 줄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 프리랜서로 나가면 이런 줄 못 쓴다. 네 번째 문제: 마감 지옥. 회사 일은 힘들어도 책임이 분산된다. 기획이 바뀌면 "기획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랜서는? 모든 책임이 내 몫이다. 클라이언트가 "수정 좀요"라고 하면 무한 리비전 들어간다. 계약서에 명시 안 했으면 무료 노동이다. "리비전 5차에서 멘탈 나가는 거 진짜 싫은데." 다섯 번째 문제: 외로움. 지금은 옆자리에 선배가 있다. 막히면 물어본다. 점심도 같이 먹는다. 프리랜서는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다. 클라이언트랑 통화하는 게 유일한 대화. "작년에 프리랜서 선배 만났는데, 사람 얼굴 보고 싶어서 카페 산다고 하더라." 그래도 DM을 확인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커미션은 받는다. 주말에 8시간씩 작업한다. 금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 저녁에 끝낸다. "완성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클라이언트가 만족한다. 입금 확인. 통장에 40만원이 들어온다. 회사 월급 외 수입. 이 돈으로 타블렛 할부금을 낸다. 또는 여자친구 생일 선물을 산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결국 못 나가는 이유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무서워서다. 지금은 매달 360만원이 통장에 꽂힌다. 확실하다. 예측 가능하다. 프리랜서는? 이번 달 500만원 벌어도 다음 달은 100만원일 수 있다. "그 불확실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29살. 결혼도 생각해야 한다. 여자친구는 안정적인 남편을 원한다. 부모님도 "회사 다니는 게 낫지 않냐"고 하신다. "그림 취미로 하면 되잖아."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이기도 하다. 타협점을 찾는 중 그래서 지금 방식을 유지한다. 평일은 회사 일. 주말은 커미션. 4대보험은 회사가 내주고, 부수입은 커미션으로 챙긴다. 포트폴리오는 회사 프로젝트로 쌓고, 개인 작업은 SNS로 알린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한 달에 2~3건만 받는다. 무리하지 않는다. 번아웃 오면 안 되니까. 그리고 계속 상상한다. "만약 프리랜서 했다면?" 엑셀 파일은 아직 삭제 안 했다. 가끔 업데이트한다. "올해 팔로워 1만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 다음 DM이 올 때까지 오늘도 커미션 DM이 왔다. "캐릭터 전신 일러스트, 50만원 예산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린다. 8시간 작업. 주말 이틀이면 가능하다. "가능합니다. 다음 주말에 시작할게요." 답장을 보내고 폰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이 정도면 프리랜서 해볼 만한 거 아냐?"답은 아직 모르겠다. 근데 오늘도 회사 간다.

밤 10시의 개인 작업이 아침 6시까지 이어지는 날들

밤 10시의 개인 작업이 아침 6시까지 이어지는 날들

퇴근하고 시작하는 진짜 일 7시에 퇴근했다. 9시 반이다. 저녁 먹고,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태블릿 켰다. 회사에서 8시간 그렸는데 또 그린다. 이상한가. 나도 안다. 이상하다는 거. 하지만 회사 그림이랑 다르다. 오늘 회사에선 '전사 캐릭터 갑옷 디테일 수정 5차'였다. 기획팀이 '좀 더 무거운 느낌'이래서 바꿨더니, 마케팅팀이 '너무 육중하다'고 했다. 결국 2차안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리는 건 내 캐릭터다. 아무도 터치 안 한다. 실루엣도 내 마음이다. 이게 진짜 그림이다.10시가 되면 손이 간다 회사 일은 의무다. 개인 작업은 선택이다. 근데 선택인데 안 하면 불안하다. '오늘 아무것도 안 그렸네' 하는 생각. 회사에서 8시간 그렸는데도. 10시쯤 되면 손이 근질거린다. 트위터 타임라인 보다가 자극받는다. 누군 멋진 팬아트 올렸다. 누군 커미션 완성본 올렸다. '나도 그려야지.' 시작하면 1시간만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게 안 된다. 러프 잡으면 채색하고 싶다. 채색하면 디테일 넣고 싶다. 디테일 넣으면 배경도 그려야 할 것 같다. 새벽 2시다.회사 그림 vs 내 그림 회사 그림은 비즈니스다. 매출이 목표다. KPI가 있다. '이 캐릭터로 얼마나 뽑을까' 생각하며 그린다. 디렉터가 '가슴 라인 좀 더'라고 하면 그린다. 마케팅에서 '이 피부색은 해외에서 안 먹힌다'고 하면 바꾼다. 내 취향은 없다. 데이터가 취향이다. 근데 밤에 그리는 건 다르다. 좋아하는 캐릭터 팬아트. 머릿속에 있던 오리지널 캐릭터. 아무도 안 봐도 되는 습작. 이게 재밌다. 회사 일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프로젝트 잘 나오면 뿌듯하다. 유저들이 '아트 진짜 좋다' 하면 기쁘다. 근데 그건 팀의 성취다. 밤 작업은 내 성취다. 차이가 크다. 새벽 4시의 몰입 가장 집중되는 시간이 있다.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세상이 조용하다. 카톡도 안 온다. 슬랙도 조용하다. 내일 회의 같은 것도 아직 멀다. 붓 터치에만 집중한다. 이 하이라이트 위치. 이 그림자 농도. 이 색감 조화. 회사에선 못 느끼는 거다. 회사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이거 오늘까지' '내일 검수 들어갑니다' '다음 주 빌드에 들어가야 해요' 밤 작업은 데드라인이 없다. 만족할 때까지 한다. 물론 다음 날 출근이 데드라인이긴 하다. 근데 그건 나중 일이다. 지금은 그림에만 집중한다. 손목이 아프다. 허리도 아프다. 눈도 뻑뻑하다. 근데 멈출 수가 없다.아침 6시의 저장 버튼 하늘이 밝아진다. '아 망했다' 생각이 든다. 저장 누른다. PSD로, JPG로, 트위터용 PNG로. 침대에 눕는다. 8시 반에 알람 맞춰뒀다. 2시간 반 잘 수 있다. 눈을 감는다. 근데 그림이 보인다. '저기 터치 좀 더 넣을걸' '색감 좀 더 조정할걸' 다시 일어나서 5분만 더 한다. 20분 지나있다. 진짜 저장한다. 침대 들어간다. 만족스럽다. 피곤하지만 개운하다. 회사 일 10시간 하고 느끼는 피곤이랑 다르다. 이건 내가 선택한 피곤이다. 출근길의 좀비 모드 알람 소리. 손으로 더듬어서 끈다. 2시간 잤다. 일어나야 한다. 사워 10분, 옷 입기 5분, 나가기 3분. 지하철에서 또 잔다. 회사 도착. 커피 뽑는다. 더블샷. 팀장이 본다. "어제 또 샜어?" "네..." "얼굴에 다 써있어. 일찍 자." 안다. 나도 안다. 근데 오늘 밤에도 할 것 같다. 책상에 앉는다. 모니터 켠다. 어제 퇴근 전에 하던 작업. '전사 캐릭터 갑옷 디테일 수정 6차' 슬랙에 메시지 떴다. "어제 5차안 검토했는데요, 어깨 장식 좀 더 과감하게 가면 안 될까요?" 한숨 나온다. 근데 오늘 밤엔 내 캐릭터 배경 넣을 거다. 판타지 숲 배경. 레퍼런스 벌써 50장 모았다. 그 생각에 버틴다. 수면 시간을 깎는 이유 왜 이러냐고 물으면 모른다. 돈도 안 된다. 트위터에 올려봤자 좋아요 100개. 커미션도 가끔. 건강도 안 좋아진다. 손목 의사가 쉬래도 안 쉰다. 눈 충혈 일상이다. 여자친구가 걱정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해야 된다고 할 순 없다. 하고 싶다가 맞다. 회사 일만 하면 뭔가 비어있다. 내 그림을 안 그린 기분. 남의 기획서 따라 그린 기분. 밤에 내 그림 그리면 채워진다. 이게 내 정체성인 것 같다. '게임 회사 원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 회사는 직업이다. 개인 작업은 나다. 그래서 잠을 깎는다. 언젠가는 바뀔까 이대로 평생 갈 순 없다. 30 넘으면 체력 떨어진다던데. 결혼하면 시간 없다던데. 지금 선배들 보면 안 그린다. "나도 옛날엔 그랬지" 한다. "나이 들면 알아" 한다. 무섭다. 개인 작업 안 하는 나를 상상한다. 퇴근하고 TV 보고 자는 나. 그게 정상인가. 나는 왜 그게 안 되나. AI 그림 나오면서 더 조급해졌다. '지금 안 그리면 언제 그리나' '내 스타일 확립해야 하는데' 그래서 더 깎는다. 수면을. 건강을. 내일의 컨디션을. 오늘의 그림을 위해. 그래도 그만둘 수 없다 새벽 6시. 또 그렸다. 내일 또 좀비로 출근한다. 팀장한테 또 잔소리 들을 거다. 근데 괜찮다. 저장한 PSD 파일 본다. 레이어 87개. 작업 시간 7시간 32분. 결과물 본다. 만족스럽다. 회사 일 100시간 해도 못 느끼는 거. 이 한 장에 있다. 트위터에 올린다. "새벽 작업 완성" 30분 만에 좋아요 50개. 댓글 몇 개 달린다. "그림체 사랑해요" "채색 미쳤다" 이맛에 한다. 잠을 깎는 건 대가가 아니다. 투자다. 미래의 나를 위한. 프리랜서 포트폴리오를 위한. 아니면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살기 위한. 침대 들어간다. 2시간 후 알람. 눈 감기 전에 생각한다. '오늘 밤엔 뭐 그릴까'출근은 좀비로, 퇴근은 화가로. 이게 내 삶이다.

번아웃 왔을 때 펜을 드는 게 무섭다는 건

번아웃 왔을 때 펜을 드는 게 무섭다는 건

펜을 드는 게 무섭다 번아웃이 왔다는 걸 처음 안 건 트위터 팔로워가 물어봤을 때다. "요즘 팬아트 안 올리시네요?" 3개월째 개인 그림을 한 장도 안 그렸다. 회사 작업은 했다. 마감도 맞췄다.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타블렛을 못 켰다.아침 7시 반에 일어난다. 씻고 9시 반 출근. 회사 도착하면 포토샵 켠다. 레퍼런스 찾는다. 러프 그린다. 기획팀이랑 미팅한다. 수정한다. 또 수정한다. 점심 먹고 디테일 작업. 아트디렉터 리뷰. 수정. 팀원들 작업 코멘트. 저녁 7시. 퇴근. 집 와서 침대에 눕는다. 타블렛 본다. 펜 잡으려다 놓는다. 유튜브 본다. 자야지. 내일도 출근. 회사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상한 건 회사 작업은 된다는 거다. 신규 캐릭터 컨셉 5종. 이번 주 금요일까지. 기획서 받아서 레퍼런스 모으고 러프 뽑는다. 손은 움직인다. 마감은 지키는데. 왜 개인 작업은 안 되지?펜을 들면 생각이 든다. "이거 그려서 뭐해." "트위터에 올려도 반응 없으면." "회사 그림도 지긋지긋한데." "내 그림체가 맘에 안 들어." 그림 그리는 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대학 때는 밤새 그렸다. 취미 일러스트 의뢰 받으면 신났다. 트위터에 낙서 올리는 게 좋았다. 지금은 타블렛 여는 게 숙제 같다. 아니, 숙제보다 무섭다. 숙제는 하면 끝인데 이건 끝이 없어서. 자책의 루프 제일 힘든 건 자책이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 다니면서도 그림 그리는데." 트위터 타임라인 본다. 동기는 개인 작업 꾸준히 올린다. 후배는 커미션도 받는다. 선배는 회사 다니면서 동인지 낸다. 나만 못하는 것 같다."5년차면 이 정도는 해야지." "프로인데 이래서 되나." "작년엔 그렸잖아." 자책하면서도 손은 안 간다. 악순환. 회사 작업할 땐 괜찮다가도 개인 작업 생각하면 막힌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고. 그려도 만족 안 될 것 같고. 완성 못 할 것 같고. 그냥 안 그리는 게 편하다. 근데 안 그리면 또 죄책감 든다. 동료가 물었다 팀 막내가 물어봤다. "선배님, 개인 작업 어떻게 시간 내세요?" "요즘 잘 안 해." "네? 트위터 보면 그림 엄청 많이 올리셨던데요." "작년까지 얘기야." 막내가 놀란 표정 지었다. 5년차 선배가 번아웃이라니. 근데 나도 놀랐다. 내가 그렇게 됐다니. 점심 먹으면서 선배랑 얘기했다. "저 요즘 개인 작업이 안 돼요." "나도 그럴 때 있어." "어떻게 해요?" "안 그려. 그냥." 선배는 담담했다. "억지로 그리면 더 싫어져. 나중엔 회사 작업도 싫어지거든. 그냥 좀 쉬어." "근데 안 그리면 실력이 떨어질 것 같아요." "3개월 쉰다고 떨어지나. 넌 5년 그렸잖아." 맞는 말인데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려야 한다는 강박 프로 작가는 매일 그려야 한다. 어디서 들은 말이다. 유튜브였나. 트위터였나. 아무튼 그렇게 믿었다. 하루라도 안 그리면 불안했다. 근데 지금은 한 달째 안 그린다. 불안하다. 근데 그린다고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그림 안 그려?" "응." "힘들어?" "그냥 손이 안 가." "쉬는 거지 뭐." 여자친구는 비업계라 이해 못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했다. "너 회사에서 매일 그리잖아. 그것도 일이야. 퇴근하고까지 그려야 돼?" "그게 아니라..." "쉬고 싶으면 쉬어. 취미도 의무 아니잖아." 취미. 맞다. 원래 취미였다. 언제부터 의무가 됐지? 회사 그림과 내 그림 회사에서 그리는 건 회사 그림이다. 당연한 말인데 잊고 있었다. 내 기획 아니다. 내 캐릭터 아니다. 내 세계관 아니다. 클라이언트는 유저고 팀이고 회사다. 물론 애정은 간다. 내가 그렸으니까. 근데 내 그림은 아니다. 개인 작업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그림이어야 한다고. 내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부담됐나 보다. 회사에서 이미 8시간 그린다. 다른 사람 기획에 맞춰서. 리비전 받아가면서. 퇴근하고 또 그려야 한다. 이번엔 내 기준으로. 내 만족으로. 트위터 반응까지 신경 쓰면서. 지칠 만도 하다. 그림을 안 그린 3개월 3개월 동안 개인 그림을 안 그렸다. 회사 작업만 했다. 퇴근하면 유튜브 보고 게임했다. 주말엔 늦잠 자고 여자친구 만났다. 처음엔 불안했다. 한 달 지나니까 무뎌졌다. 두 달 지나니까 편했다. 트위터는 안 봤다. 타임라인 보면 다들 그림 올리는 것 같아서. 그림 생각은 했다. 가끔. 출근길에 보는 풍경이라든지. 점심 먹으면서 본 고양이라든지. '저거 그리면 예쁘겠다' 생각만 했다. 그리진 않았다. 신기한 건 회사 작업이 조금 나아진 것이다. 리비전이 줄었다. 컨셉이 한 번에 통과됐다. 아트디렉터가 칭찬했다. "요즘 그림 좋아졌네?" 나도 모르겠다. 뭐가 달라진 건지. 어느 날 손이 갔다 3개월 반쯤 지났을 때다. 퇴근하고 집에 왔다.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폰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생각났다. 오늘 점심 때 본 고양이. 타블렛 켰다. 클립 스튜디오 열었다. 새 캔버스. 러프로 고양이 그렸다. 30분쯤? 완성은 안 했다. 러프만 그리고 껐다. 근데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그냥 그렸다. 누가 보라고도 아니고. 올리려고도 아니고. 완성하려고도 아니고. 그냥 그림. 회복은 천천히 그 다음 주에 또 그렸다. 역시 러프만. 일주일에 한두 번. 러프만. 30분씩. 완성은 안 했다. 완성하려면 또 부담될 것 같아서. 한 달쯤 그렸더니 자연스럽게 디테일도 들어갔다. 완성까지는 아니고 중간쯤? 그림 그리는 게 조금 편해졌다. 트위터는 아직 안 올린다. 올려도 되는데 굳이 안 올린다. 반응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나를 위해 그린다. 그리고 싶어서 그린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다시 배웠다. 5년 전엔 알았던 건데 잊고 있었다. 번아웃을 겪고 나서 지금은 일주일에 서너 번 그린다. 적당히. 부담 없이. 완성작도 가끔 나온다. 완성 안 해도 괜찮다는 걸 알고 나니까 오히려 완성이 된다. 트위터엔 한 달에 한두 번 올린다. 올릴 만한 게 생기면. 팔로워는 줄었다. 7500명쯤? 괜찮다. 내가 즐거우면 된다. 회사 작업도 여전히 한다. 마감도 지킨다. 근데 이제 안다. 회사 그림은 회사 그림이다. 내 그림은 내 그림이다. 둘은 다르다. 둘 다 중요하지만 섞이면 안 된다. 퇴근하고 안 그려도 괜찮다. 프로는 매일 안 그려도 된다. 5년간 쌓인 건 3개월 쉰다고 안 없어진다. 그림은 의무가 아니다. 원래 좋아서 시작한 거다. 번아웃이 온 사람에게 지금 번아웃이면 쉬어도 된다. 억지로 그리지 마. 더 싫어진다. 회사 작업만 해도 괜찮다. 그것도 그림이다. "개인 작업 안 하면 실력 떨어진다"는 거짓말이다. 5년 그린 사람이 3개월 쉰다고 떨어지나. 트위터 끄고 폰 내려놔. 남들 그림 보면 조급해진다. 여자친구 말이 맞았다. 취미는 의무가 아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다시 그리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그 순간은 온다. 억지로 안 만들어도 온다. 나한테 왔으니까. 지금은 요즘 그림 그리는 게 좋다. 다시. 회사에선 회사 그림. 집에선 내 그림. 구분이 확실해졌다. 개인 작업이 부담 안 된다. 그리고 싶으면 그린다. 아니면 안 그린다. 간단하다. 타블렛 여는 게 무섭지 않다. 펜을 드는 게 부담 안 된다. 5년 전 처음 그림 그릴 때처럼은 아니다. 근데 괜찮다. 그때랑 지금은 다르니까. 지금은 쉬는 것도 안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번아웃은 끝이 아니다. 쉬어가는 구간이다.펜을 드는 게 무서울 땐, 안 들어도 된다는 걸 배웠다.

픽시브와 아트스테이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은 이유

픽시브와 아트스테이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은 이유

아침 8시 루틴 눈 뜨면 핸드폰. 픽시브 알림부터 확인한다. 밤새 올라온 일본 작가들 그림. 한국 작가들 팬아트. 아트스테이션 Popular 섹션. 이게 5년째 루틴이다. 출근 준비하면서도 스크롤. 지하철에서도 스크롤. 회사 도착해서 컴퓨터 켜면 또 확인. 이상하게 안 보면 불안하다. 뭔가 놓칠 것 같아서. "오늘도 괴물들이 그림 올렸네." 혼잣말이 나온다.그때는 몰랐다 2019년. 신입 때. 선배가 알려줬다. "픽시브 매일 봐. 일본 작가들 퀄리티 장난 아니야." 그때만 해도 신기했다.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아트스테이션도 그때 처음. 해외 AAA급 아티스트들 작업물. 입이 안 다물어졌다.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 순수했다. 정말로. 매일 봤다. 레퍼런스 수집 명목으로. 좋아요 누르고 팔로우하고. PSD 파일 분석하고. 실력이 늘었다. 확실히. 눈이 높아지니까 손도 따라왔다. 1년 만에 팀장한테 칭찬받았다. "많이 늘었네?" 픽시브 덕분이었다. 아트스테이션 덕분이었다. 고마웠다.3년차부터 이상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보는 게 괴로웠다. 일본 작가 A. 나랑 동갑. 팔로워 50만. 화집 3권 냈다. 한국 작가 B. 나보다 어림. 넷플릭스 애니 메인 원화. 중국 작가 C. 미호요 소속. 내가 좋아하는 게임 만든다. "나는 뭐하고 있지?" 매일 보는데 자꾸 비교됐다. 픽시브 랭킹 들어간 적 없다. 아트스테이션 Popular 한 번도 못 올라갔다. 회사 일은 잘한다고 한다. 팀에서 에이스래. 근데 그게 뭔 의미야. 저 사람들은 전 세계가 보는데. 출근길 지하철. 픽시브 보다가 한숨 나온다. "왜 보는 거야. 또 우울해지는데." 손은 스크롤하고 있다.악순환의 시작 픽시브 보면 → 좌절 → 그래도 봐야지 → 또 좌절. 이게 매일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그려?" "나는 왜 발전이 없지?" "5년 됐는데 이 정도면 재능 없는 거 아냐?" 회사에서 그린 캐릭터. 괜찮게 나왔다. 팀장이 좋다고 했다. 근데 퇴근하고 픽시브 보니까. 비슷한 컨셉 그림이 있다. 10배는 잘 그렸다. "아 씨." 기분이 바닥친다. 여자친구가 물어본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피곤해." 말 못 한다. 이상하게 들릴까 봐. '다른 사람 그림 보고 우울해요' 이게 뭔 소린가. 근데 진짜 우울하다. 그래도 못 끊는다 일주일만 안 보자. 작심했다. 3일 버텼다. 회사에서 캐릭터 디자인 의뢰 들어왔다. "판타지풍 여전사. 레퍼런스 찾아봐." 핑계가 생겼다. 픽시브 켰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자기합리화다. 2시간 동안 레퍼런스 수집. 아니 사실 구경. 좋아요 100개 누른 거 같다. 북마크 30개. 정작 우리 프로젝트랑 맞는 건 5개. 시간 낭비인 거 안다. 근데 못 끊는다. 마약 같다. 진짜로. "이번엔 다르겠지. 영감 받겠지." 매번 똑같은 기대. 매번 똑같은 실망. 가끔 도움이 되긴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실력은 늘었다. 5년 전 나랑 지금 나. 비교 안 된다. 픽시브에서 본 브러시 터치. 따라해봤다. 내 그림에 적용됐다. 아트스테이션에서 본 라이팅 기법. 연습했다. 회사 작업에 썼다. 팀장이 놀랐다. 일본 작가 트위터에서 본 작업 과정. GIF로 올라온 거. 분석했다. 내 워크플로우가 바뀌었다. "역시 고수들은 다르네." 배운다. 분명히. 그림 그릴 때 머릿속에 레퍼런스 수백 개가 있다. 다 거기서 본 거다.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확실하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 게 문제다. 비교의 늪 실력은 늘었는데 자존감은 바닥이다. 이상한 일이지. 픽시브 랭킹. 1위부터 100위까지 다 본다. "나는 언제 저기 들어가나." 아트스테이션 Trending. 24시간 동안 올라온 그림들. "저 사람 작년에 신인이었는데. 벌써 저렇게 됐네." 숫자가 보인다. 좋아요 수. 팔로워 수. 조회수. 내 트위터. 팔로워 8000명. 적은 건 아니다. 근데 저 사람들은 10만. 50만. 100만. "차이가 뭐야." 그림 실력? 운? 마케팅? SNS 빨? 모르겠다. 근데 자꾸 비교된다. 회사 동기가 말했다.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자신감 가져." 고맙다. 진심으로. 근데 픽시브 보면 그 자신감이 사라진다. "잘 그린다는 게 뭐야.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은데." AI 시대의 추가 타격 요즘 더 복잡해졌다. 픽시브에 AI 그림이 넘친다. NovelAI. Stable Diffusion. Midjourney. "10분 만에 이걸 뽑았대." 나는 10시간 걸린다. 아트스테이션도 마찬가지. AI 태그 논란 있었다. "우리 끝난 거 아냐?" 동기들이랑 술 마시면서 한 얘기. 다들 불안해한다. 그래도 픽시브는 본다. 아트스테이션도 본다. 이제는 AI 그림까지 레퍼런스 삼는다. "이 구도 괜찮네. 이 색감 참고해야지." 아이러니다. 내 일자리 위협하는 AI한테 배운다. 웃긴 건. 그래도 안 본 수가 없다. "안 보면 도태될 거 같아." 강박이다. 새벽 2시의 나 개인 작업 중이다. 커미션. 10만원짜리. 회사 일 끝나고 집 와서. 밥 먹고 샤워하고. 11시부터 시작. 3시간 그렸다. 러프 끝났다. "색 넣기 전에 레퍼런스 좀 볼까." 픽시브 켰다. 한 시간 지났다. 레퍼런스는 안 찾았다. 그냥 구경했다. 좋아요 눌렀다. 부러웠다. "아 시간 아깝다. 그림 그려야 하는데." 근데 못 끈다. 한 명 더. 이 작가 새 그림 올렸네. 포트폴리오 처음부터 다시 본다. 새벽 3시. "내일 출근인데." 여자친구한테 카톡 왔다. "자?" "아직. 작업 중." 거짓말 아니다. 작업은 하고 있다. 픽시브 보는 것도 작업이라면 작업이다. 아니다. 이건 도피다. 내 그림 그리기 무서워서. 비교당할까 봐. 못 그릴까 봐. 다른 사람 그림 보는 게 더 편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5년 전 내 그림 봤다. 어제. 옛날 파일 정리하다가. "헐. 이게 내가 그린 거야?" 부끄러웠다. 솔직히. 비율도 이상하고. 채색도 어설프고. 구도도 뻔하고. 근데 그때는 최선이었다. 지금 나는 다르다. 확실히 늘었다. 누가 늘려줬나. 회사? 선배? 학원? 아니다. 픽시브였다. 아트스테이션이었다. 매일 봤으니까. 눈이 높아졌으니까. 따라하려고 했으니까.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진짜로. 이건 사실이다. 근데 동시에. 없었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실이다. 이중성 좋아한다. 픽시브. 아트스테이션. 싫어한다. 픽시브. 아트스테이션. 둘 다 진심이다. 고마워. 여기까지 오게 해줘서. 원망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모순이다. 맞다. 근데 이게 현실이다. 매일 아침 핸드폰 켠다. 픽시브 알림 확인한다. "오늘은 자극 안 받고 그냥 감상만 하자." 10분 뒤. "아 진짜. 나는 왜 이 모양이야." 매일 반복이다. 그래도 내일도 볼 거다. 끊을 수 없다. 끊고 싶지도 않다. 이상하게 들린다. 안다. 근데 이게 나다. 5년째 이렇게 산다. 앞으로도 이럴 거다. 결론이랄 것도 없다 픽시브와 아트스테이션.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사실. 없었으면 더 평화로웠다. 그것도 사실. 답이 없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거다. 보고. 배우고. 좌절하고. 그래도 그리고. 내일도 출근한다. 출근길에 픽시브 본다. 또 괴물들 그림 올라와 있겠지. "하아." 한숨 나온다. 근데 뭐. 이게 내 일상이다.매일 보고 매일 흔들린다. 그래도 그린다. 이게 원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