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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 27 Dec, 2025
밤 10시의 개인 작업이 아침 6시까지 이어지는 날들
퇴근하고 시작하는 진짜 일 7시에 퇴근했다. 9시 반이다. 저녁 먹고,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태블릿 켰다. 회사에서 8시간 그렸는데 또 그린다. 이상한가. 나도 안다. 이상하다는 거. 하지만 회사 그림이랑 다르다. 오늘 회사에선 '전사 캐릭터 갑옷 디테일 수정 5차'였다. 기획팀이 '좀 더 무거운 느낌'이래서 바꿨더니, 마케팅팀이 '너무 육중하다'고 했다. 결국 2차안으로 돌아갔다. 지금 그리는 건 내 캐릭터다. 아무도 터치 안 한다. 실루엣도 내 마음이다. 이게 진짜 그림이다.10시가 되면 손이 간다 회사 일은 의무다. 개인 작업은 선택이다. 근데 선택인데 안 하면 불안하다. '오늘 아무것도 안 그렸네' 하는 생각. 회사에서 8시간 그렸는데도. 10시쯤 되면 손이 근질거린다. 트위터 타임라인 보다가 자극받는다. 누군 멋진 팬아트 올렸다. 누군 커미션 완성본 올렸다. '나도 그려야지.' 시작하면 1시간만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게 안 된다. 러프 잡으면 채색하고 싶다. 채색하면 디테일 넣고 싶다. 디테일 넣으면 배경도 그려야 할 것 같다. 새벽 2시다.회사 그림 vs 내 그림 회사 그림은 비즈니스다. 매출이 목표다. KPI가 있다. '이 캐릭터로 얼마나 뽑을까' 생각하며 그린다. 디렉터가 '가슴 라인 좀 더'라고 하면 그린다. 마케팅에서 '이 피부색은 해외에서 안 먹힌다'고 하면 바꾼다. 내 취향은 없다. 데이터가 취향이다. 근데 밤에 그리는 건 다르다. 좋아하는 캐릭터 팬아트. 머릿속에 있던 오리지널 캐릭터. 아무도 안 봐도 되는 습작. 이게 재밌다. 회사 일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다. 프로젝트 잘 나오면 뿌듯하다. 유저들이 '아트 진짜 좋다' 하면 기쁘다. 근데 그건 팀의 성취다. 밤 작업은 내 성취다. 차이가 크다. 새벽 4시의 몰입 가장 집중되는 시간이 있다.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세상이 조용하다. 카톡도 안 온다. 슬랙도 조용하다. 내일 회의 같은 것도 아직 멀다. 붓 터치에만 집중한다. 이 하이라이트 위치. 이 그림자 농도. 이 색감 조화. 회사에선 못 느끼는 거다. 회사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이거 오늘까지' '내일 검수 들어갑니다' '다음 주 빌드에 들어가야 해요' 밤 작업은 데드라인이 없다. 만족할 때까지 한다. 물론 다음 날 출근이 데드라인이긴 하다. 근데 그건 나중 일이다. 지금은 그림에만 집중한다. 손목이 아프다. 허리도 아프다. 눈도 뻑뻑하다. 근데 멈출 수가 없다.아침 6시의 저장 버튼 하늘이 밝아진다. '아 망했다' 생각이 든다. 저장 누른다. PSD로, JPG로, 트위터용 PNG로. 침대에 눕는다. 8시 반에 알람 맞춰뒀다. 2시간 반 잘 수 있다. 눈을 감는다. 근데 그림이 보인다. '저기 터치 좀 더 넣을걸' '색감 좀 더 조정할걸' 다시 일어나서 5분만 더 한다. 20분 지나있다. 진짜 저장한다. 침대 들어간다. 만족스럽다. 피곤하지만 개운하다. 회사 일 10시간 하고 느끼는 피곤이랑 다르다. 이건 내가 선택한 피곤이다. 출근길의 좀비 모드 알람 소리. 손으로 더듬어서 끈다. 2시간 잤다. 일어나야 한다. 사워 10분, 옷 입기 5분, 나가기 3분. 지하철에서 또 잔다. 회사 도착. 커피 뽑는다. 더블샷. 팀장이 본다. "어제 또 샜어?" "네..." "얼굴에 다 써있어. 일찍 자." 안다. 나도 안다. 근데 오늘 밤에도 할 것 같다. 책상에 앉는다. 모니터 켠다. 어제 퇴근 전에 하던 작업. '전사 캐릭터 갑옷 디테일 수정 6차' 슬랙에 메시지 떴다. "어제 5차안 검토했는데요, 어깨 장식 좀 더 과감하게 가면 안 될까요?" 한숨 나온다. 근데 오늘 밤엔 내 캐릭터 배경 넣을 거다. 판타지 숲 배경. 레퍼런스 벌써 50장 모았다. 그 생각에 버틴다. 수면 시간을 깎는 이유 왜 이러냐고 물으면 모른다. 돈도 안 된다. 트위터에 올려봤자 좋아요 100개. 커미션도 가끔. 건강도 안 좋아진다. 손목 의사가 쉬래도 안 쉰다. 눈 충혈 일상이다. 여자친구가 걱정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해야 된다고 할 순 없다. 하고 싶다가 맞다. 회사 일만 하면 뭔가 비어있다. 내 그림을 안 그린 기분. 남의 기획서 따라 그린 기분. 밤에 내 그림 그리면 채워진다. 이게 내 정체성인 것 같다. '게임 회사 원화가'가 아니라 '그림 그리는 사람' 회사는 직업이다. 개인 작업은 나다. 그래서 잠을 깎는다. 언젠가는 바뀔까 이대로 평생 갈 순 없다. 30 넘으면 체력 떨어진다던데. 결혼하면 시간 없다던데. 지금 선배들 보면 안 그린다. "나도 옛날엔 그랬지" 한다. "나이 들면 알아" 한다. 무섭다. 개인 작업 안 하는 나를 상상한다. 퇴근하고 TV 보고 자는 나. 그게 정상인가. 나는 왜 그게 안 되나. AI 그림 나오면서 더 조급해졌다. '지금 안 그리면 언제 그리나' '내 스타일 확립해야 하는데' 그래서 더 깎는다. 수면을. 건강을. 내일의 컨디션을. 오늘의 그림을 위해. 그래도 그만둘 수 없다 새벽 6시. 또 그렸다. 내일 또 좀비로 출근한다. 팀장한테 또 잔소리 들을 거다. 근데 괜찮다. 저장한 PSD 파일 본다. 레이어 87개. 작업 시간 7시간 32분. 결과물 본다. 만족스럽다. 회사 일 100시간 해도 못 느끼는 거. 이 한 장에 있다. 트위터에 올린다. "새벽 작업 완성" 30분 만에 좋아요 50개. 댓글 몇 개 달린다. "그림체 사랑해요" "채색 미쳤다" 이맛에 한다. 잠을 깎는 건 대가가 아니다. 투자다. 미래의 나를 위한. 프리랜서 포트폴리오를 위한. 아니면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살기 위한. 침대 들어간다. 2시간 후 알람. 눈 감기 전에 생각한다. '오늘 밤엔 뭐 그릴까'출근은 좀비로, 퇴근은 화가로. 이게 내 삶이다.
- 22 Dec, 2025
게임 동아리 선후배들과의 술자리: 업계 정보 교환의 장
6시 30분, 홍대입구역 칼퇴했다. 드물게. 선배가 단톡에 "오늘 모이자" 던져서 나왔다. 동아리 선후배 6명. 모두 게임 회사. 1년에 2~3번 보는 사람들. 그런데 편하다. 역 앞 이자카야. 자리 잡으니 7시. "요즘 어때?" 시작은 항상 이렇다."어디 회사냐"는 질문의 무게 신입 후배가 왔다. 작년에 취업했다고. "형들, 저 N사 다녀요." 테이블에 침묵 3초. N사. 업계 1위. 연봉 6500부터 시작한다는 그곳. "오, 거기?" 선배가 웃는다. "힘들지? 거기 야근 장난 아니라며." 후배가 고개 끄덕인다. "네, 근데 배우는 건 많아요." 나는 맥주만 마신다. 우리 회사는 중견. 5000에서 시작했다. 1500 차이. 크다.급여 얘기는 조심스럽게 두 잔 들어가니 본론이다. "너네 회사 연봉 어때?" 선배가 던진다. 5년차. "나 6800." 대기업 다니는 선배. "나 5500." 중견 다니는 동기. "5000..." 나. 후배가 눈치 본다. "저... 6500이요." 신입이 나보다 많다. 씁쓸하다. 그런데 예상했다. 회사 규모가 곧 급여다. 이 바닥에서. "근데 거기 보너스 없잖아." 동기가 말한다. "우린 출시하면 300~500 나와." 위로인지 사실인지 모르겠다. 복지 비교는 끝이 없다 이야기는 복지로 넘어간다. "우린 점심 회사서 줘." N사 후배. "택시비도 나오고, 야근하면 저녁도." "헬스장도 사내에 있어요." 우리 회사? 점심은 각자. 택시비는 10시 넘어야. 헬스장은 근처에 등록했다. 내 돈으로. "대신 넌 11시까지 박히잖아." 선배가 웃는다. "우린 7시면 나가." 후배가 고개 끄덕인다. "네... 그건 맞아요." 트레이드오프. 항상 있다. 돈 vs 시간. 배움 vs 여유.컨셉 이야기로 신난다 술 세 잔째. 진짜 얘기가 나온다. "너네 요즘 뭐 그려?" 대기업 선배가 묻는다. "모바일 RPG 캐릭터." 내가 답한다. "아, 그거. 티저 봤어. 퀄 좋던데." 이 순간 기분이 좋다. 급여 얘기할 땐 쪼그라들었는데 그림 얘기하니까 펴진다. "근데 기획이 맨날 바뀌어서..." "아, 우리도. 지난주에 캐릭 5개 엎었어." "ㄹㅇ? 미쳤네." 고통 공유. 위로가 된다. 다들 똑같구나. 싶어서. 동기가 태블릿 꺼낸다. "이거 봐봐. 어제 그린 건데." 모두 모인다. 화면 들여다본다. "여기 터치감 좋은데?" "실루엣 확실하네." "근데 발 비율이..." 5분간 크리틱. 즐겁다. 회사에서 하는 리뷰랑 다르다. 순수하게 그림만 본다. 정치 없이. AI 이야기는 늘 나온다 후배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형들, AI 어떻게 생각하세요?" 테이블이 조용해진다. 다들 생각이 있다. 말하기 조심스러운. "우리 팀에 AI 담당 생겼어." 대기업 선배. "배경은 이제 AI로 뽑고 우리가 수정." "빨라. 진짜. 하루 걸릴 거 1시간." 나는 복잡하다. "근데 그럼 우리는?" 선배가 맥주 마신다. "모르겠어. 적응해야지." 동기가 다른 각도로 본다. "AI는 컨셉 못 잡아. 결국 방향은 우리가." "도구야, 도구. 포토샵처럼." 후배는 불안해 보인다. "저 이제 시작인데..." "괜찮아." 선배가 어깨 친다. "중요한 건 컨셉 잡는 능력." "그건 AI 못 배껴." 위로인지 사실인지. 우리도 모른다. 솔직히. 이직 이야기는 늘 있다 술이 더 들어간다. "나 이직 알아보는 중." 동기가 말한다. "어디?" "P사 오픈 포지션 떴어." 모두 관심 집중. "거기 연봉 어때?" "6000 초반 준대. 근데 프로젝트 좋아." "IP가 좋아서. 포폴에 넣으면 빛남." 이직. 이 바닥에서 연봉 올리는 법. 같은 회사서 매년 200씩 오르는 것보다 옮기면 500~1000 뛴다. "나도 생각 중이야." 내가 말한다. "3년 있었으니까 슬슬." 선배가 고개 끄덕인다. "그래, 경력 쌓였으면 알아봐." "5년차면 어디서든 원해." 후배는 듣고만 있다. 1년차. 아직 멀다. 정보 교환의 진짜 가치 이 자리의 핵심은 이거다. 급여 범위. 복지 비교. 회사 분위기. "K사는 칼퇴지만 성장 없대." "M사는 배우는 건 많은데 야근 지옥." "S사는 프로젝트 자주 엎어." 이런 정보. 검색해도 안 나온다. 블라인드에도 반쪽. 직접 만나야 진짜가 나온다. "너네 회사 중도 채용 어때?" "요즘 뽑아. 캐릭터 디자이너." "오, 지원해볼까?" 연결. 추천. 정보. 이 자리가 주는 것들. 나도 메모한다. 머릿속으로. "P사 연봉 6000 초반." "N사 신입 6500, 야근 많음." "K사 칼퇴, 성장 적음." 언젠가 쓸 데이터. 그래도 결국은 그림 10시 반. 2차 가자는 말이 나온다. 절반은 간다. 절반은 집. 나는 집 가는 쪽. 내일 오전 미팅 있다. "수고했어." 인사한다. "담에 또 보자." 집 가는 길. 지하철. 오늘 나온 정보 정리한다. 연봉, 복지, 이직. 중요하다. 현실이니까. 그런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동기가 보여준 그림. "여기 터치감 좋은데?" 그 순간. 그림 얘기할 때가 제일 편했다. 돈 얘기, 회사 얘기 다 중요한데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건 그림이다.내일은 출근. 다시 현실. 그래도 오늘은 좋았다.
- 21 Dec, 2025
명절에 내려갈 때 부모님이 묻는 질문들
명절에 내려갈 때 부모님이 묻는 질문들 KTX 안에서 대구 가는 KTX 표를 샀다. 명절 4일 전. 15만 원. 이번에도 어머니가 물을 것이다. "게임 그림 그리는 거 아직도 해?" 5년차다. 아직도라니. 가방에 아이패드 넣었다. 부모님께 뭘 하는지 보여줄까 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소용없다. 작년에도 보여드렸다. "그래, 그림 잘 그리네. 그래서 월급은?" 월급은 세전 417만 원. 실수령은 340만 원. 서울에서 혼자 살면 빠듯하다. 대구 기준으로는 괜찮은 돈이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30년 근속. 어머니는 교사셨다. 28년. 두 분 다 정년퇴직. 안정이 답인 세대다.집에 도착 "왔니?" "응." "밥 먹었어?" "기차에서." 짐 풀었다. 방은 그대로다. 고등학교 때 붙인 애니메이션 포스터. 미대 입시 때 그린 석고상 데생. 서울 올라간 지 7년인데 시간이 안 간다. 저녁이다. 아버지가 소주 따르신다. "회사는 잘 다니고 있고?" "네." "게임 회사가... 요즘도 잘 되나?" "회사마다 다르죠." 우리 회사는 작년에 게임 하나 출시했다. 흥했다. 보너스 300만 원 받았다. 그 얘기는 안 한다. 자랑 같아서. "근데 그 게임 그림 그리는 거는, 계속 할 수 있는 거야?" 시작됐다.'안정적인' 직업 어머니가 끼어드신다. "네 고등학교 동창 준호 있잖아. 걔 공무원 됐대." "응." "9급인데 지금 7급 됐대. 시험 또 봐서." 준호는 미술 못 그렸다. 수학도 못했다. 영어는 더 못했다. 근데 공무원 됐다. "준호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이제 안정적이래." 안정적. 그 단어 나왔다. "아들, 너도 공무원 시험 볼 생각은 없고?" "없어요." "게임 회사가 언제 망할지 모르잖아." 설명할까 말까 고민했다. 우리 회사는 직원 200명이다. 작년 매출 300억. 5년 내에 망할 확률은 낮다. 근데 설명해봤자다. 작년에도 설명했다. "그래도 공무원은 평생 직장이잖아." 평생 직장. 우리 세대한테 그게 뭔 의미인데.진짜 하는 일 아버지가 물으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하는 건데?" "게임 캐릭터 디자인이요." "...캐릭터?" TV를 켰다. 아이패드를 연결했다. 우리 회사 게임을 보여드렸다. "이 캐릭터들요. 제가 디자인한 거예요." 화면에 여캐가 나온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검은 옷. 뱀파이어 콘셉트다. 어머니가 화면을 본다. "...치마가 좀 짧지 않니?" 시작됐다. "게임이 원래 그래요." "요즘 게임이 다 이렇게 야한 거야?" "야한 게 아니라 판타지예요." 설명이 안 된다. 타겟 유저는 20~30대 남성이다. 과금 동력은 캐릭터 매력도다. '섹시함'은 디자인 요소 중 하나다. 이 말을 부모님께 할 수 있나.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그래도 네가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버니까, 그건 좋은 거지." "..." "근데 이게 계속 할 수 있는 일이냐는 거야." 계속 할 수 있냐는 질문 진짜 답은 모르겠다. 5년차까지 왔다. 10년차까지 갈 수 있을까? 15년차는? 업계 선배 중에 15년차는 본 적 없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프리랜서가 됐거나. 다른 업종으로 갔거나. 아니면 팀장이 됐거나. 나는 팀장 체질이 아니다. 관리보다 그림 그리는 게 좋다. 그럼 15년 후엔? AI 얘기는 안 꺼냈다. 요즘 AI가 그림을 그린다. 프롬프트 입력하면 5초 만에 나온다. 퀄리티는 아직 사람보다 낮다. 근데 1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5년 후에는? 10년 후에는? "계속 할 수 있어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그냥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꾸준히 다니기만 하면." 꾸준히 다니기만 하면. 게임 업계는 그렇게 안 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팀이 해체된다. 게임이 망하면 대규모 구조조정이다. 작년에 옆 회사가 망했다. 직원 150명 중 100명 잘렸다. 아는 선배가 거기 있었다. 8년차였다. 지금 다른 회사 다닌다. 연봉은 2000만 원 깎였다. "꾸준히만 다니면 되니?" "...네." 연애는 하냐는 질문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먼저 돌리신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응." "어떤 사람인데?" 여자친구는 비업계다. 회사원이다. 마케터. 연애한 지 1년 반. "회사 다니는 사람이요." "나이는?" "동갑." "집은 어디?" 서울 마포구. 부모님이랑 산다. 그 얘기는 안 했다. "서울이요." "결혼 생각은 있고?" 1년 반 사귀었는데 결혼은 먼 얘기다. 나는 월세 40만 원 원룸에 산다. 여자친구는 부모님 집에 산다. 결혼하면 전세가 필요하다. 서울 전세는 최소 3억이다. 나한테 3억이 없다. 부모님께 손 벌릴 수도 없다. 여자친구 부모님께도 미안하다.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서른인데 생각을 해야지." 올해 서른이다. 동창들은 결혼 많이 했다. 준호도 작년에 했다. 청첩장 받았다. 축의금 5만 원 보냈다. 게임 원화가 평균 결혼 나이가 궁금하다. 찾아본 적 없다. 무서워서. 건강 챙기라는 말 저녁 먹고 설거지했다. 어머니가 내 손을 보신다. "손목에 뭐 찼니?" "보호대요." "왜?" "손목이 좀 아파서." 거짓말 반. 손목이 많이 아프다. 하루 10시간 그린다. 타블렛에 펜을 쥐고. 손목은 계속 같은 각도다. 작년부터 아팠다. 정형외과 갔다. "손목터널증후군 초기예요. 쉬세요." 쉴 수가 없다. 마감이 있다. 파스 붙이고 그린다. 진통제 먹고 그린다. 주말에도 그린다. 커미션 해야 한다.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몸 상하면서까지 할 일이야?" 할 일이다. 이게 내 일이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시작했다. 지금은 그림 그려야 살 수 있다. "괜찮아요. 쉬면 나아요." "병원은 갔어?" "다녀왔어요." MRI 찍으라고 했다. 30만 원이다. 아직 안 찍었다. 명절 마지막 날 서울 올라가는 날이다. 짐을 쌌다. 어머니가 반찬 주신다. 김치, 멸치볶음, 장조림. 무겁다. 고맙다. 현관에서 신발 신는다. 아버지가 나오신다. "잘 다녀라." "응." "몸 조심하고." "응."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다. 잠깐 멈추신다. "...게임 그림 그리는 거. 네가 좋아서 하는 거면, 그냥 해." "..." "근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목이 멘다. "응." KTX 탔다. 창밖을 본다. 부모님은 내 일을 모르신다. 게임 원화가가 뭔지. 하루에 뭘 하는지. 얼마나 힘든지. 설명해도 모르신다. 세대가 다르니까. 근데 걱정은 하신다. 그걸 알면 됐다. 서울 도착 집 도착했다. 원룸이다. 6평. 반찬 냉장고에 넣었다. 짐 풀었다. 여자친구한테 카톡 보냈다. "도착" "ㅇㅇ 오늘 만날래?" "피곤해 내일" "ㅇㅋ" 씻었다.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 봤다. 회사 단톡방에 메시지 100개. 내일부터 다시 출근이다. 생각한다. 부모님 질문에 제대로 답한 게 있나. "게임 회사 계속 다닐 수 있어?" 모르겠다.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어?" 모르겠다. "그 일, 계속 할 거야?" ...모르겠다. 근데 내일 출근은 한다. 그림은 그린다. 마감은 맞춘다. 지금은 그게 답이다. 불 껐다.부모님이 이해 못 하시는 게 서운한 건 아니다. 나도 부모님 세대를 이해 못 한다. 그냥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거다. 각자 최선을 다하면서.
- 15 Dec, 2025
기획팀과의 신크: 내 머리로 생각한 것과 그들의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
회의실 테이블 위의 침묵 화요일 오전 10시. 회의실. 모니터에 내 컨셉이 떴다. 어젯밤 11시까지 잡고 있던 여전사 캐릭터. 갑옷 디자인에 3시간 걸렸다. 망토 펄럭이는 느낌 살리려고 레퍼런스 50개 봤다. "음..." 기획팀장 입에서 나온 첫 소리. 좋은 "음"이 아니다. 5년 하면 안다. 이건 "별로"의 "음"이다. "컨셉은 좋은데요." 여기서 "~은 좋은데"가 나오면 끝이다. 뒤는 안 들어도 안다. "뭔가 우리가 생각한 느낌이 아니라서요." 왔다.우리가 생각한 느낌 "우리가 생각한 느낌"이란 게 뭔데. 기획서엔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전사"라고 써있었다. 그래서 갑옷은 투박하게, 얼굴은 부드럽게 그렸다. 포즈는 당당하게. 색은 차분하게. "좀 더 섹시하게 갈 수 없을까요?" 아. "근데 너무 노골적이면 안 되고요." 어. "강인한 건 유지하면서요." 응? 메모한다. "섹시 + 강인 + 절제". 삼각형 그리고 물음표 세 개. 옆에 앉은 김 과장이 덧붙인다. "참고로 타겟 유저층이 20대 후반 남성이라서요." 알아요. 그거 알고 그렸는데요. "근데 여성 유저도 무시 못 하니까요." 그럼 뭘 그려요. "그 밸런스가 중요한 거죠." 네. 밸런스. 중요하죠.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왔다. 모니터 껐다 켰다. PSD 파일 다시 열었다. 레이어 150개. 어제 내 6시간. 휴지통에 넣진 않았다. "버림" 폴더에 옮겼다. 언젠간 쓸 수도. 머릿속 이미지와 기획서 사이 점심시간. 식당 가는 길에 신입 원화가 물어봤다. "선배님, 기획서랑 다르게 그리면 안 돼요?" "응. 안 돼." "그럼 기획서대로만?" "그것도 아니야." "...네?" 설명해줬다. 기획서는 방향이다. 북쪽으로 가라는 거다. 근데 어떻게 가는지는 안 써있다. 걸어갈지 뛰어갈지 우리가 정한다. 문제는 기획팀 머릿속엔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다는 거다. 근데 그걸 말로 표현 못 한다. "강인하면서 여성스러운"같은 말로 포장한다. 우리는 그 말을 해석해서 그린다. 근데 기획팀이 생각한 거랑 다르다. "아 이게 아닌데." 그럼 다시 그린다. 또 다르다. "음, 거의 왔는데." 세 번째쯤 되면 맞다. "오! 이거예요!" 그게 처음 내가 그린 거랑 별 차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럼 처음부터 이렇게 그리시죠?" 못 그려. 기획팀 머릿속이 뭔지 몰라서.그 다음날 아침 수요일 오전 9시 50분. 출근했다. 커피 뽑았다. 자리 앉았다. 어제 회의 내용 다시 봤다. 메모장에 끄적인 키워드들. "섹시", "강인", "절제", "밸런스", "타겟층". 레퍼런스 다시 모았다. 핀터레스트 1시간. "female warrior sexy elegant"로 검색. 나온 건 다 코스프레 사진이다. 아트스테이션으로 넘어갔다. 여기가 낫다. 프로들 작업물 보면 힌트가 있다. 어제 내가 그린 거 다시 켰다. 뭐가 문제였나. 갑옷이 너무 투박했나. 비율이 안 맞나. 표정이 딱딱한가. 30분 봐도 모르겠다. 그냥 다시 그린다. 새 캔버스. 러프부터. 이번엔 갑옷을 좀 줄였다. 어깨랑 가슴 부분만 남기고 팔은 노출. 허벅지도 살짝. 근데 너무 노골적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망토를 길게. 포즈를 바꿨다. 어제는 정면 직립이었다면 오늘은 살짝 비틀었다. 검은 어깨에 메고. 한 손은 허리에. 표정도 수정. 어제는 무표정이었다면 오늘은 미소. 근데 방긋 웃는 게 아니라 비웃는 느낌. "강인함" 살리려고. 3시간 걸렸다. 러프 완성. 팀장한테 슬랙 보냈다. "1차 수정본입니다." 답장 왔다. "오후에 봐요."상상력의 간극 오후 3시. 다시 회의실. 모니터에 수정본 띄웠다. 팀장이 턱을 괴고 봤다. 김 과장도 봤다. 기획팀 막내도 봤다. 10초. 20초. "오." 좋은 "오"다. 이건 안다. "이게 낫네요." 왔다. "근데 표정이 좀 세 보여서요. 조금만 부드럽게 갈 수 있을까요?" 네. 갈 수 있죠. "그리고 망토가 너무 길어서 실루엣이 무거워 보이는데, 짧게 해도 될까요?" 네. 되죠. "갑옷 색상도 좀 밝게요.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답답해 보여요." 네네. 밝게요. 메모했다. "표정 부드럽게", "망토 짧게", "색상 밝게". 회의 끝나고 나왔다. 복도에서 숨 쉬었다. 괜찮다. 리비전 2차. 보통이다. 6차까지 간 적도 있다. 자리 돌아와서 수정 시작했다. 표정은 입꼬리 내렸다. 망토는 무릎까지. 갑옷 색상은 채도 올리고 명도 올렸다. 1시간 만에 끝났다. 다시 보냈다. 30분 후 답장. "OK. 이거로 갑시다." 됐다. 파일 저장하면서 생각했다. 처음 그린 거랑 뭐가 달라진 건가. 갑옷 노출 늘고 망토 짧아지고 색 밝아졌다. 근데 "강인하면서 여성스러운 전사"라는 컨셉은 그대로다. 변한 건 표현 방식. 그게 기획팀이 원한 거다. 같은 말, 다른 그림. 내 머리와 그들의 머리 저녁 7시. 퇴근 준비하면서 오늘 작업 돌아봤다. 기획팀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도 고민한다. 유저가 뭘 좋아할지. 어떤 캐릭터가 팔릴지. 근데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머릿속 이미지를 종이에 옮기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설명한다.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나는 그림은 그리는데 기획을 못 한다. 유저 취향, 시장 트렌드, 수익 구조.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실에서 만난다. 그들의 말과 내 그림이 부딪힌다. 한 번에 안 맞는다. 두 번, 세 번 조정한다. 그게 "신크"다. 처음엔 답답했다. "왜 내 그림대로 안 가는 거야." 3년 차까지 그랬다. 지금은 안다. 이게 회사다. 내 그림이 아니라 우리 게임이다. 그래도 가끔은 서럽다. 어제 밤 11시까지 붙잡고 있던 갑옷 디자인. "버림" 폴더에 쌓여간다. 언젠간 쓸 거다. 내 게임 만들 때. 프리랜서 되면. 1인 개발 하면. 그때까지는 참는다. 집 가서 개인 작업 켰다. 여기선 내가 기획자다. 맘대로 그린다. 그게 숨통이다.내일도 회의실. 또 맞춰볼 거다. 그들의 상상력과 내 손끝이.
- 14 Dec, 2025
게임 출시 보너스를 기다리며: 개발 기간은 불확실성의 연속
또 미뤘다 회의실에 들어갔다. PD가 말했다. "출시일 6개월 연장합니다." 아무도 말 안 했다. 다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2년 개발이 2년 반이 됐다. 나는 계산기 켰다. 보너스 6개월 뒤로 밀렸다. 전세 갱신은 4개월 남았다.2년 전 그날 2년 전 킥오프 미팅. PD가 말했다. "18개월 개발, 1년 반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믿었다. 신입 때 했던 게임은 2년 걸렸다. 이번엔 팀도 크고 예산도 많았다. 컨셉 아트 100장 넘게 그렸다. 메인 캐릭터만 7번 엎었다. "더 임팩트 있게", "좀 더 대중적으로". 18개월 지나고. 알파 테스트도 못 했다. "6개월만 더요." 그게 작년이었다.보너스 계산법 우리 회사 보너스는 출시 기준이다. 개발비의 일정 %를 팀원들한테 나눈다. 내 예상 보너스: 2000만원. 세후 1600만원쯤. 전세 갱신 보증금 올랐다. 5000에서 6000으로. 1000만원 필요하다. 나머지 600으로 뭐 할까 생각했었다. 타블렛 바꾸려고 했다. 여자친구랑 일본 가려고 했다.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6개월 뒤로 밀렸다. 전세는 4개월 남았다. 대출 받아야 한다.연장의 이유들 "빌드 최적화가 안 됐어요." "스토리 분기가 너무 복잡해요." "QA에서 크리티컬 버그 200개 나왔습니다." 매번 이유는 달랐다. 본질은 같았다. 기획이 너무 컸다. 2년 전 기획서. 300페이지. "신작은 크게 가야죠." 아트팀은 처음부터 말했다. "이 볼륨이면 3년 걸립니다." 안 들었다. "다른 팀들은 2년에 해요." 다른 팀들 게임 봤다. 캐릭터 10명이었다. 우린 47명이다. 팀원들 반응 점심시간. 다들 조용했다. 신입이 물었다. "보너스 언제 나와요?" 선배가 답했다. "내년 상반기? 아니면 하반기?" 누가 웃었다. "나오긴 나와?" 게임이 망하면 보너스 없다. 출시해도 매출 안 나오면 반토막. 2년 반 동안 그린 그림들. 내 인생 베스트 작업이었다. 시장에서 먹힐지는 모른다. 동기는 떠났다 작년에 동기가 나갔다. 다른 회사로. "보너스 기다리다가 30대 다 가겠어." 연봉 1500 올려 받고 이직했다. 그때 나도 고민했다. 2년 그린 게임. 끝을 못 보고 가기 싫었다. 지금 후회된다. 동기는 벌써 새 게임 출시했다. 보너스 받았다. 1000만원. 나는 아직도 기다린다. 2000만원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일하는 마음 요즘 손이 안 간다. "어차피 또 미뤄질 텐데." 캐릭터 수정 요청 왔다. "눈빛 좀 더 날카롭게." 전에는 10번이라도 고쳤다. 지금은 3번에서 멈춘다. 번아웃이다. 2년 반 동안 같은 캐릭터. 메인 여주인공. 처음엔 예뻐서 좋았다. 100번째 수정할 땐 얼굴도 보기 싫었다. 이제는 그냥 일이다. 출시하고 끝내고 싶다. 불확실성의 연속 게임 개발은 원래 이렇다. 선배들이 말한다. "3년짜리도 있어." "5년 개발하다 엎은 것도 봤어." 위로가 안 된다. 나는 내 인생이 불확실해진다. 전세 계약. 결혼 계획. 부모님 용돈. 다 보너스에 달려 있다. 회사는 말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기다린다. 선택지가 없다. 2년 반 투자했다. 지금 나가면 0원이다. 썬크 코스트. 경제학 시간에 배웠다. 이미 쓴 돈은 의사결정에서 빼라고. 못 뺀다. 2년 반이 아깝다. 개발 연장의 무게 회사 입장은 안다. 망한 게임 내는 것보다 낫다. 완성도 높여서 성공 확률 올린다. 개발자 입장은 다르다. 6개월은 내 인생의 시간이다. 29살. 30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었다. 보너스 받으면 청첩장 돌리려고 했다. 여자친구한테 말했다. "좀 더 기다려줘." 세 번째 하는 말이다. 그녀는 말 안 한다. 눈빛으로 안다. 지쳤다고. 다른 선택지 이직 공고 본다. 요즘 많이 본다. "신작 개발, 컨셉 아티스트 모집" 연봉: 5500만원. 500 오른다. 보너스 없어도 2년이면 1000만원. 계산한다. 여기서 6개월 더 기다리고 2000 받기. vs 지금 이직해서 연봉 500 올리기. 손해다. 그래도 확실하다. 포트폴리오 정리했다. 이력서 업데이트했다. 아직 안 넣었다. 마지막 6개월. 기다려 보려고. 직장인의 도박 친구가 말했다. "그거 도박이잖아." 맞다. 2년 반 투자. 결과는 6개월 뒤. 성공하면 2000. 실패하면 0. 확률은 모른다. 내부 테스트는 좋다. 시장 반응은 모른다. 요즘 게임 시장 어렵다. 경쟁작 많다. 유저들 눈높이 높다. 우리 게임 괜찮다. 그래픽은 자신 있다. 스토리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확신은 못한다. 게임은 결국 재미다. 재미는 나도 모른다. 개발자는 객관적일 수 없다. 주변 사례들 작년에 옆팀 게임 출시했다. 대박 났다. 보너스 3000씩 받았다. 올해 다른 팀 게임 나왔다. 망했다. 보너스 300 받았다고 들었다. 3000과 300. 10배 차이. 개발 기간은 비슷했다. 2년 반, 2년. 노력도 비슷했을 것이다. 차이는 운이었다. 시장 타이밍. 경쟁작 유무. 마케팅. 우리 게임 운은 모른다. 카운트다운 6개월 남았다. 180일. 달력에 표시했다. 출시 예정일. 빨간 동그라미. 하루하루 센다. 오늘 179일. 내일 178일. 전세 갱신 120일 남았다. 보너스보다 빠르다. 대출 알아봤다. 금리 5%. 1000만원 빌리면 이자 월 4만원. 6개월이면 24만원. 보너스에서 까면 된다. 나온다면. 그래도 일한다 출근한다. 매일. 손은 안 가도 그린다. 번아웃 와도 작업한다. 프로니까. UI 아이콘 50개 남았다. 몬스터 컨셉 20개 남았다. 배경 러프 10개 남았다. 다 끝내야 한다. 출시 전에. 6개월. 빡빡하다. 야근 시작됐다. 주 3회. 마감 다가오면 매일. 보너스 생각한다. 2000만원. 시급 계산하면 안 된다. 이미 했다. 2년 반. 야근 포함하면 시급 2만원. 편의점 알바랑 비슷하다. 웃긴다. 동료들과의 연대 야근하면서 이야기한다. 다들 비슷하다. "대출 받아야 될 것 같아." "나도." "이직 알아봤어?" "응. 넣지는 않았어." 웃으면서 말한다. 쓸쓸하다. 우리 모두 인질이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의. 그래도 같이 있으니 낫다. 혼자였으면 진작 나갔다. 밤 10시. 치킨 시켰다. 회사 카드로. 다 같이 먹는다. 아트팀 8명. 누가 말한다. "우리 게임 대박 나면 좋겠다." 다들 고개 끄덕인다. 말은 안 해도 안다. 간절하다는 걸. 마지막 6개월 6개월 뒤. 게임 나온다. 대박 날 수도 있다. 망할 수도 있다. 2000만원 받을 수도 있다. 300만원 받을 수도 있다. 그때까지 그린다. 최선을 다한다. 프로니까. 그리고 기다린다. 불확실성 속에서.6개월. 길다. 짧다. 모르겠다. 그냥 그린다.
- 09 Dec, 2025
캐릭터를 '좀 더 섹시하게' 달라는 요청의 심리 분석
오전 10시 47분, 슬랙 알림 회의실에서 돌아왔다. 기획팀장이 던진 말 하나. "이 캐릭터, 좀 더 섹시하게 해주세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내렸다. 화면에는 내가 사흘 밤낮 그린 여전사 컨셉이 떠 있다. 갑옷 입고 검 든 캐릭터. 나름 멋있게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손이 안 움직인다. 섹시. 섹시하게. 더 섹시하게. 이 단어의 정의가 뭔지 아는 사람 있나.섹시의 52가지 정의 일단 레퍼런스부터 찾았다. 아트스테이션에 'sexy character' 검색. 나오는 건 죄다 다르다. 어떤 건 노출이 많다. 어떤 건 포즈가 야하다. 어떤 건 그냥 얼굴이 예쁘다. 우리 팀장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슬랙에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3분. "팀장님, 섹시의 방향성이 어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노출도를 높이는 건지, 실루엣을 강조하는 건지, 아니면 포즈나 표정 쪽인지..." 답장이 왔다. 7분 후. "음... 그냥 좀 더 매력적으로요. 느낌 아시죠?" 모른다. 전혀 모른다. '느낌 아시죠'는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오후 2시, 첫 번째 시도 일단 그려봤다. 허벅지를 좀 더 드러냈다. 갑옷 하의를 짧게. 어깨 갑옷도 좀 줄이고. 30분 작업. 팀 리뷰에 올렸다. 기획팀장: "음... 이건 좀 야한 것 같은데요?" 나: "...?" 아까 섹시하게 하라며. 기획팀장: "섹시한 건 맞는데, 너무 노골적이면 유저들이 거부감 느낄 수도 있잖아요." 손이 멈췄다. 그럼 대체 어느 선이냐고. "좀 더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요." 우아. 섹시. 우아하면서 섹시. 모순 아닌가. 저장도 안 하고 레이어 삭제했다. 오후 4시, 두 번째 시도 이번엔 포즈를 바꿨다. S라인을 강조한 포즈. 허리를 꺾고 가슴을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전형적인 '섹시 포즈'다. 핀터레스트에서 100번은 본 구도. 그리면서도 찝찝했다. 이 자세로 싸우면 허리 나간다. 하지만 일단 그렸다. 1시간 반. 팀 채널에 올렸다. 아트 디렉터가 답했다. "포즈가 너무 어색해요.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자연스러운 섹시 포즈. 이게 뭔 말인지 아는 사람.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철학자가 아니다.섹시 요청의 심리학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섹시하게'라고 말할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첫째, 본인도 모른다. 그냥 지금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를 때. "좀 더 섹시하게"라고 하면 그럴싸해 보인다. 둘째, 책임 회피다. "노출 늘려주세요"라고 하면 나중에 문제 생길 때 본인 말이 된다. "섹시하게"는 애매해서 책임 안 진다. 셋째, 성적 매력을 직접 언급하기 민망하다. 회사에서 "가슴을 더 크게", "다리를 더 길게" 이런 말 못 한다. HR 들어가면 끝이다. 그래서 '섹시'라는 완곡어법을 쓴다. 결국 나는 마인드 리더가 되어야 한다. 아트 디렉터가 아니라 심리학자. 대학에서 인체 해부학은 배웠는데 심리학은 안 배웠다. 오후 6시, 질문의 용기 참다가 물어봤다. 회의실에 기획팀장 불렀다. "팀장님, 죄송한데요. '섹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어색한 침묵. 3초 정도. "아... 그러니까... 음..." 팀장도 모른다. 확신했다. "예를 들어, 레퍼런스 같은 거 있으세요? 이런 느낌이다 하는." "아... 레퍼런스요... 음..." 핸드폰을 꺼내더니 게임 몇 개 보여줬다. 다 다른 스타일이었다. 검은사막, 니어 오토마타, 페르소나. "이런 느낌들이요." 이 셋의 공통점을 찾으라는 건가. 그냥 "예쁜 여캐"가 공통점 아닌가. 하지만 뭔가 실마리는 잡혔다. "아, 그럼 실루엣이 살면서 의상이 타이트한 느낌인가요?" "네! 그거요! 그런 느낌!" 드디어. 30분 만에 하나 건졌다. [PROMPT_THUMBNAIL: anime style illustration, Korean male concept artist having discussion with team leader in meeting room, laptop showing various character designs, both looking at reference images on phone, soft office lighting, Studio Ghibli aesthetic, warm collaborative atmosphere, manga style, game development scene] 저녁 8시, 세 번째 시도 레퍼런스 보고 다시 그렸다. 갑옷은 유지하되 실루엣이 살도록. 타이트한 느낌. 몸의 라인을 따라가는 디자인. 노출은 줄이고 핏은 살렸다. 포즈도 자연스럽게. 싸우는 자세인데 역동적이고. 2시간 걸렸다. 팀 채널에 올렸다. 30분 후. 기획팀장: "오! 이거 좋은데요?" 아트 디렉터: "이 방향 괜찮습니다." 프로그래머: "멋있네요." 드디어. 겉으로는 "감사합니다"라고 쳤지만.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이걸 왜 처음부터 말 안 해. 밤 10시, 혼자 정리 퇴근하고 집에 왔다. 타블렛 앞에 앉았다. 개인 작업 하려고. 손이 안 움직인다. 오늘 하루 종일 그렸는데 또 그리기 싫다. 그냥 유튜브 켰다. 게임 원화 메이킹 영상. 댓글에 누가 썼다. "기획팀이 맨날 애매하게 지시해서 힘들어요 ㅠㅠ" 공감. 100% 공감.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원화가의 90%가 겪는 일이다. "더 멋있게", "더 예쁘게", "더 섹시하게". 형용사로 지시하는 사람들. 우리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애매한 형용사를 구체적인 시각 언어로. 그게 우리 일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그림 그리는 거고. 누가 미대 입시할 때 이런 거 알려주나. 실기 시험에 '애매한 지시 번역하기' 과목 있나. 없다. 현장에서 깨진다. 섹시의 정답 결국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섹시의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노출이 섹시다. 어떤 사람은 신비로운 게 섹시다. 어떤 사람은 강한 여자가 섹시다. 어떤 사람은 청순한 게 섹시다. 기획팀장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냥 "뭔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 그걸 '섹시하게'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우리는 그 포장을 뜯어야 한다. 질문으로. "어떤 섹시함인가요?" "레퍼런스 있나요?" "이런 방향인가요, 저런 방향인가요?" 민망해도 물어야 한다. 안 물어보면 3번 그린다. 나처럼. 물어보면 1번 반에 끝난다. 시간은 돈이다. 내 저녁 시간도 돈이다. 내일 할 일 내일은 남자 캐릭터 컨셉 회의다. 이번엔 기획팀이 뭐라고 할까. "좀 더 간지나게 해주세요"? "더 카리스마 있게"? 벌써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 물어볼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인지 말씀해주세요." "레퍼런스 있으시면 공유해주세요." 5년 차면 이제 이 정도 배짱은 있다. 신입 때는 눈치 보느라 묻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애매한 지시를 그대로 받는 게 오히려 무책임이라는 걸. 명확하게 만드는 게 프로다. 타블렛 덮었다. 내일 또 싸운다. 애매한 형용사들과."섹시하게"는 지시가 아니다. 숙제 문제다. 정답은 대화로 찾는다.
- 08 Dec, 2025
트위터 팬아트 8000팔로워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토요일 오후 3시 또 올렸다. 이번 주 핫한 신작 게임 캐릭터 팬아트. 2시간 걸렸다. 러프 30분, 채색 1시간, 마무리 30분. 효율적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업로드 버튼 누르는 순간 손이 떨렸다. 8247명이 보고 있다.처음엔 좋았다. 3년 전 팔로워 300명일 때만 해도 '와, 내 그림 좋아해 주는 사람이 300명이나 돼' 이랬다. 1000명 넘을 땐 신났다. 2000명 땐 '진짜 잘 그리나 봐' 착각했다. 5000명 넘어가면서부터 이상했다. 지금은 8000명. 숫자가 올라갈수록 그림 올리기가 무섭다. 댓글 창을 열면 "이번 건 별로네요" "전에 그린 거보다 못한 것 같은데" "손 비율이 이상해요" "이 캐릭터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요" 300명일 때는 "우와 멋져요!" "잘 봤습니다!" 이런 댓글뿐이었다. 8000명이 되니까 다르다. 100명 중 1명만 비판적이어도 80명이다. 숫자가 보인다. 매번.회사에서 하루 종일 수정 먹고 집 와서 또 수정 댓글 읽는 기분이 뭔지 아나. 지친다. 좋아요는 평균 800개 나온다. 리트윗 200개. 북마크 500개.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수치다. 근데 어제 그린 건 좋아요 650개였다. 150개 차이에 밤새 생각했다. '뭐가 문제였지? 구도? 채색? 타이밍?' 병이다. 알고 있다. 금요일 밤의 루틴 퇴근하고 9시. 샤워하고 치킨 시켜 먹고 10시. 타블렛 켠다. "오늘은 뭘 그릴까." 예전엔 그냥 그리고 싶은 거 그렸다. 좋아하는 캐릭터, 마음에 드는 구도, 시도해보고 싶은 채색. 지금은 다르다. "지금 뭐가 핫하지?" "어떤 게임이 트렌드지?" "어떤 캐릭터 그려야 반응 잘 나올까?" 트위터 타임라인 1시간 본다. 유튜브로 신작 게임 트레일러 본다. 픽시브 랭킹 확인한다. 전략적으로 그린다. 취미가 아니라 콘텐츠를.새벽 2시에 완성한다. 바로 올리지 않는다. "내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예약 업로드." 통계 봤다. 토요일 오후 3시~5시 사이가 반응 제일 좋다. 금요일 밤은 타임라인이 빠르게 흘러가서 묻힌다. 일요일 밤은 다들 우울해서 좋아요를 덜 누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한다. 8000명이 기다린다는 착각. 회사 동료가 물었다 "형 트위터 팔로워 많다며? 부업 의뢰 많이 들어오죠?" 많이 들어온다. 한 달에 캐릭터 커미션 5~6건. 건당 30만원에서 50만원. 많을 땐 월 200만원 번다. 회사 월급이 세후 350만원. 커미션까지 하면 550만원. "프리랜서 안 해요? 그 정도면 되지 않아요?" 된다. 계산해봤다. 여러 번. 캐릭터 일러스트 단가 50만원으로 잡고, 한 달에 10건만 해도 500만원이다. 지금 회사 월급보다 많다. 거기에 개인 굿즈 만들어서 팔면 더 벌 수 있다. 근데 안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년에도 8000명일까?" 팔로워는 변한다 2년 전 팔로워 5000명이었던 선배 있다. 지금 3000명이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다. "그림 스타일 바꿨더니 팔로워가 줄더라. 그리고 한 달 안 올렸더니 더 줄었어." 무섭다. 트위터 팔로워는 은행 잔고가 아니다. 적금이 아니다. 쌓이지 않는다. 관리해야 한다. 주 1회는 업로드해야 한다. 트렌드 따라가야 한다. 댓글 달아야 한다. 다른 작가 그림에 좋아요 눌러야 한다. 안 하면 줄어든다. 회사는 다르다. 출근만 하면 월급 나온다. 실적 안 좋아도 당장 잘리진 않는다. 연차 쌓인다. 4대 보험 있다. 프리랜서는? 일 안 들어오면 수입 0원이다. "8000명 팔로워 있으니까 걱정 없겠네요." 걱정뿐이다. 일요일 저녁의 불안 이번 주 팬아트 반응 좋았다. 좋아요 950개. 역대급이다. 기분 좋다. 5분간. 그다음 생각. "다음 주엔 뭘 그리지?" "이번보다 반응 안 좋으면 어떡하지?" "이 퀄리티 매주 유지할 수 있나?" 회사 일은 시키는 거 한다. 기획서 넘어오면 그린다. 수정 지시 오면 고친다. 마감 지키면 된다. 트위터는 다르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기획도 내가. 마감도 내가. 홍보도 내가. 자유로운 게 아니라 모든 책임이 내게 있다. 8000명이 기다린다는 압박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미친 거 맞다. 여자친구가 말했다 "요즘 주말에 맨날 그림만 그리네. 같이 놀자."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 주부터는 안 그린다고. 거짓말이다. 다음 주도 그린다. 안 그리면 불안하다. 팔로워 줄까 봐. 사람들이 날 잊을까 봐. "팔로워가 뭐라고 그래? 진짜 친구도 아니고." 맞는 말이다. 8000명 중에 내 이름 아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아프면 걱정해 줄 사람 있을까. 근데 숫자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나 잘 그리는 사람이야. 8000명이 증명해 줘.' 회사에서 상사한테 "이거 다시 그려" 들어도 버틸 수 있다. '트위터에선 인정받는데 뭐' 하면서. 병적인 거 안다. 근데 끊을 수가 없다. 회사 후배의 질문 "선배님은 회사 일이랑 개인 작업 어떻게 구분해요?" 구분 못 한다. 회사에서 배운 기술로 트위터 그림 그린다. 트위터 반응 보고 회사 컨셉에 적용한다. 경계가 없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모르겠다. 후배는 순수하다. "저는 회사 일은 회사 일이고, 제 그림은 제 그림이에요." 부럽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회사에서 게임 캐릭터 그리고, 집에서 내 취향대로 그렸다. 8000명 생기면서 바뀌었다. 집에서 그리는 그림도 '누가 볼 그림'이 됐다. 순수하게 나만 보려고 그린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새벽 3시의 솔직함 술 한 잔 했다. 혼자. 트위터 들어갔다. 팔로워 목록 봤다. 8247명. 이 중에 진짜 내 그림 좋아하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은 팔로우 수백 명 하는 사람들이다. 타임라인에 스쳐 지나가는 그림 중 하나일 뿐.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인정받을수록 불안해진다. 역설이다. 팔로워 300명일 때가 제일 행복했다. '내 그림 좋아해 주는 사람이 300명이나 있어' 순수하게 기뻤다. 8000명 됐는데 행복하지 않다. '8000명을 유지해야 해. 더 늘려야 해. 떨어지면 안 돼.' 숫자가 목표가 됐다. 프리랜서 하면 더 불안할 것 같다. 회사는 최소한 고정 수입이 있다. 프리랜서는 매달 8000명을 증명해야 한다. '나 일 잘해요'를. 못 하겠다. 그래도 그린다 월요일 아침. 출근한다. 점심시간에 트위터 확인한다. 토요일에 올린 그림 좋아요 1024개 됐다. 1000 넘었다. 기분 좋다. 퇴근하고 집 온다. 타블렛 켠다. "이번 주엔 뭘 그리지." 또 그린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묻는다면. 둘 다다. 8000명이 있어서 그림 그릴 이유가 생긴다. 8000명이 있어서 그림 그리기 힘들어진다. 없으면 외롭고, 있으면 불안하다. 근데 솔직히. 내일도 그릴 거다. 8000명이 보든 말든. 아니, 본다는 게 중요한 거다. 누가 보니까 끝까지 그린다. 누가 보니까 퀴리티 올린다. 누가 보니까 포기 안 한다. 혼자였으면 진작 관뒀을 거다. 그러니까 축복이다. 불편한. 답은 없다 프리랜서 할 거냐고? 모르겠다. 다음 달에도 똑같은 고민할 거다. 내년에도. 8000명이 1만 명 되면 결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때도 똑같을 거다. '1만 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겠지. 숫자는 답이 아니다. 근데 숫자를 본다. 매일.팔로워 8000명은 자랑도 아니고 실력도 아니다. 그냥 불안의 크기다.
- 04 Dec, 2025
AI 그림 뉴스를 본 날의 불안감
뉴스피드 출근길 지하철에서 봤다. 뉴스 헤드라인. "AI, 이제 게임 캐릭터도 그린다... 3분이면 완성" 스크롤을 멈췄다. 기사를 열었다. 어떤 스타트업에서 만든 AI래. 텍스트만 입력하면 캐릭터 컨셉아트를 뽑아준다고. 클릭 몇 번이면 의상 바리에이션까지. 베타 테스터 후기가 달려있었다. "이제 아티스트 안 구해도 되겠네요 ㅋㅋ" 회사 도착했다. 자리에 앉았다. 포토샵을 켰다. 어제 그리던 캐릭터가 보였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주름 하나하나. 8시간 걸린 작업이다.마우스를 잡았다. 손이 무겁다. 회의실에서 오전 10시. 팀 미팅. 팀장이 말했다. "요즘 AI 그림 툴들 봤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말했다. "미드저니 결과물 보니까 퀄리티 괜찮던데요." 팀장이 웃었다. "우리 일자리는 안전하겠죠. 캐릭터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팀장 표정이. 확신에 찬 게 아니었다. 회의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왔다. 기획팀에서 메신저가 왔다. "컨셉 5개 더 부탁드려요. 내일까지요." 5개. 하루에. 예전 같으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오늘은 "네"라고 답했다. AI는 3분이면 된다는데. 나는 하루에 5개도 못 그리면 안 되는 거 아닐까.점심 먹으면서 아트스테이션을 봤다. 검색창에 "AI art" 쳤다.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퀄리티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라이팅이 자연스럽다. 구도가 탄탄하다. 컬러 하모니도 괜찮다. 댓글을 봤다. "이거 진짜 AI가 그렸어요?" "프롬프트 공유 가능하신가요?" "아티스트 시대 끝났네 ㅋㅋ" 밥맛이 없어졌다. 5년의 무게 오후 3시. 작업 중. 신입이 물었다. "선배님, 손 떨림 보정 어떻게 써요?" 보정 설정을 알려줬다. 브러시 세팅도 공유했다. 레이어 구조 설명하고. 컬러 피커 쓰는 법도. 5년이면 쌓이는 게 이런 거다. 단축키. 워크플로우. 효율적인 러프 방법. 빠른 수정 노하우. 근데 AI한테는 필요 없는 것들이다. AI는 손 떨림이 없다. 레이어를 안 쓴다. 러프 과정이 없다. 수정은 프롬프트 한 줄이면 된다. 저녁 7시. 퇴근했다. 집 가는 길에 편의점 들렀다. 맥주 두 캔 샀다. 원룸 문 열고 들어왔다. 불 켰다. 타블렛이 보인다. 책상 위에 그림 자료집들. 벽에 붙인 캐릭터 시트들. 5년 동안 모은 것들이다. 의미가 있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맥주를 땄다. 한 모금 마셨다. 유튜브를 켰다. 추천 영상에 또 떴다. "AI 그림으로 월 500만원 버는 법" "미드저니로 일러스트 10분 만에 그리기" "아티스트는 이제 끝인가?" 영상을 틀었다. 꺼버렸다. 다시 틀었다. 끝까지 봤다. 댓글창을 내렸다. "그림쟁이들 이제 뭐 먹고 살아요 ㅋㅋ" "AI한테 못 지는 게 뭐 있나요?" "창의성은 못 따라한다던데... 그것도 시간문제 아님?" "전업러들 각오하세요" 댓글을 읽다가. 마지막에. 한 댓글이 보였다. "저도 원화가인데 요즘 매일 불안해요. 같은 마음이신 분들 많으시네요." 좋아요가 327개였다. 밤 2시 샤워하고 나왔다.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온다. 핸드폰을 들었다. 트위터를 켰다. 타임라인에 그림쟁이들 글이 보인다. "AI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뭐 해야 할까요" "요즘 그림 그리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져요" "5년 배운 건데 3분짜리한테 질 수도 있다니" 리트윗했다. 좋아요 눌렀다. 같은 고민하는 사람이 나만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되면서도. 더 무섭다. 업계 전체가 흔들리는 거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앉았다. 타블렛을 켰다. 클립스튜디오를 열었다. 새 캔버스. 3000x3000. 뭘 그릴까 생각했다. 아무 생각이 안 났다. 프롬프트로 설명 못 할 그림을 그려야 하나. AI가 못 그리는 걸 그려야 하나. 근데 그게 뭔데. 손이 안 움직인다. 10분 있었다. 그냥 빈 캔버스만 보고. 창을 닫았다. 유튜브 켰다. 아무 영상이나 틀었다. 새벽 2시 40분. 침대로 돌아왔다. 천장을 봤다. 5년이다. 5년 동안 매일 그렸다. 러프 몇천 장. 완성작 몇백 개. 손목에 굳은살. 허리 디스크 초기. 밤새 작업하던 날들. 리젝 당하고 다시 그리던 시간들. 그게 3분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다.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단톡방을 봤다. 대학 동기들 방. 마지막 메시지가 어제였다. 누가 올린 AI 그림 뉴스. 아무도 답을 안 달았다. 다들 생각은 똑같을 거다. 말 안 해도 안다. 불안하다는 거. 무섭다는 거. 내일이 안 보인다는 거. 메시지 입력창을 눌렀다. 뭐라고 칠까 했다. 지웠다. 핸드폰을 내려놨다. 눈을 감았다. 내일 출근하면. 또 그림 그린다. 컨셉 5개. 하루 만에. AI보다 빠를 순 없다. 근데 AI보다 나은 게 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려야 하니까 그린다. 5년 동안 해온 거니까. 다른 건 할 줄 모르니까. 그게 5년차 게임 원화가의 2024년이다. 새벽 3시. 겨우 잠들었다.내일도 출근한다. 그림 그린다. 그게 답인지는 모르겠다.
- 03 Dec, 2025
실루엣이 안 살아요: 채택 안 되는 컨셉 10개의 공통점
실루엣이 안 살아요: 채택 안 되는 컨셉 10개의 공통점 또 떨어졌다 기획팀에서 피드백 왔다. "실루엣이 약해요." 10개 그렸다. 디테일 살렸다. 질감도 넣었다. 컬러도 3버전씩. 채택은 1개도 없다. "디자 님, 실루엣부터 잡고 오세요." 5년 차에 듣는 말이다. 화가 난다기보다 허탈하다. 어제 밤 11시까지 작업했다. 벨트 버클 하나하나 다 그렸다. 갑옷 스크래치도 넣었다. 근데 실루엣이 약하다니. 커피 마시고 다시 파일 열었다. 검은색으로 채웠다. 아, 이거. 다 똑같이 생겼다.2년 차 때 모르던 것 신입 때는 몰랐다. 디테일이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선배가 5분 만에 그린 러프가 채택됐다. 내가 3일 그린 건 떨어졌다. 이해 안 됐다. 내 게 더 디테일했는데. "실루엣부터 봐." 선배가 그때 했던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게임 캐릭터는 3cm로 보인다. 모바일은 더 작다. 디테일은 안 보인다. 실루엣만 보인다. 기획서에 '원거리 딜러'라고 써 있으면. 실루엣만 봐도 원거리여야 한다. 활 들고 있어야 한다. 몸은 날씬해야 한다. 근데 내가 뭘 그렸나. 갑옷 입은 궁수. 실루엣은 전사다. "이거 탱커 아닌가요?" 기획팀 말이다. 할 말 없다. 떨어진 10개의 공통점 지난 3개월간 떨어진 컨셉들 모았다. 정확히 37개다. 채택률 27%. 처참하다. 공통점 찾았다. 1. 팔다리가 몸통에 붙어 있다 검은색으로 채우면 한 덩어리다. 팔이 어딘지 모른다. 다리도 마찬가지. 액션 포즈인데 정지해 보인다. 유니티에서 돌려보면 더 심하다. 움직이는데 뭐가 움직이는지 모른다. 2. 머리 장식이 과하다 뿔 달고, 깃털 달고, 왕관 쓰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실루엣 보면 머리가 3배다. 몸은 안 보인다. "이 캐릭터 컨셉이 뭐예요?" 물어보면 대답 못 한다. 머리 장식이 컨셉을 먹어버렸다. 3. 무기가 작다 이건 진짜 많이 했다. 현실적으로 그리려고. 검은 팔 길이만큼. 총은 실제 크기로. 게임에서는 안 보인다. 무기 든 건지 맨손인지 구별이 안 된다. 오버워치 봐라. 해머는 몸만 하다. 게임은 과장이다.4. 대칭이다 왼쪽 오른쪽 똑같다. 갑옷도 대칭. 망토도 가운데. 칼집도 정중앙. 안정적이다. 근데 재미없다. 실루엣이 밋밋하다. 채택되는 디자인은 비대칭이다. 한쪽 어깨만 갑옷. 한쪽 팔만 문신. 한쪽으로 흐르는 천. 5. 포즈가 정면이다 T포즈로 그렸다. 팔 벌리고 다리 모으고. 깔끔하다. 보기 좋다. 근데 게임에서는 안 쓴다. 게임은 측면이다. 뛰고 싸우고 구른다. 측면 실루엣 테스트 안 한 게 후회된다. 6. 얼굴에 집착했다 눈 디테일 2시간 그렸다. 속눈썹 하나하나. 입술 하이라이트. 게임에서 얼굴은 1cm다. 안 보인다. 근데 작업 시간의 30%를 얼굴에 썼다. 실루엣 작업은 10%도 안 했다. 7. 천이 너무 많다 망토, 스카프, 치마, 소매. 휘날리는 천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실루엣 보면 천이 몸을 가린다. 체형이 안 보인다. 근육도 갑옷도 다 가려졌다. "이 캐릭터 전사예요, 법사예요?" 기획팀이 물었다. 천 때문에 모른다. 8. 컬러로 구별하려 했다 "실루엣 비슷해도 컬러가 다르면 되죠." 2년 차 때 내가 한 말이다. 틀렸다. 색약 모드 있다. 흑백으로 봐도 구별돼야 한다. 실루엣이 전부다. 9. 유행 따라갔다 요즘 뭐가 유행인가. 트위터 보고 아트스테이션 보고. 비슷하게 그렸다. 근데 우리 게임 컨셉이랑 안 맞는다. 실루엣도 기존 캐릭터랑 겹친다. 유행은 레퍼런스지 답이 아니다. 10. 테스트 안 했다 제일 큰 문제다. 그냥 제출했다. 실루엣 확인 안 하고. 검은색 채우기 5초면 된다. 근데 안 했다. 귀찮아서. 디테일 작업에 취해서. 결과는 리젝이다.지금 하는 방법 이제는 실루엣부터 그린다. 순서가 바뀌었다. 1단계: 러프 실루엣 10개 검은 덩어리만 그린다. 10분에 하나씩. 디테일 없다. 그냥 형태만. 포즈도 다르게. 정면, 측면, 3/4. 액션 포즈도 섞는다. 10개 나란히 놓고 본다. 겹치는 거 지운다. 남은 건 3개. 2단계: 팀 리뷰 실루엣만 보여준다. "이거 뭐 들고 있나요?" 물어본다. 대답 나오면 통과다. "모르겠는데요" 나오면 수정이다. 디테일 들어가기 전에 방향 잡는다. 시간 아낀다. 3단계: 3가지 포즈 테스트 채택된 실루엣을 3가지 포즈로 그린다. 서 있기, 공격, 달리기. 전부 실루엣 살아야 한다. 하나라도 뭉개지면 다시 수정. 4단계: 디테일 작업 여기서부터 디테일 넣는다. 질감, 컬러, 장식. 근데 실루엣 해치면 안 된다. 디테일은 실루엣 안에서만. 작업 중간중간 검은색 채워본다. 실루엣 체크다. 5단계: 최종 테스트 완성본을 축소한다. 3cm 크기로. 모바일 화면에 띄워본다. 구별되면 통과. 안 되면 실루엣 다시. 디테일은 확대해서 볼 때만 보인다. 근데 게임은 축소가 기본이다. 기획팀이 보는 것 기획팀은 디테일 안 본다. 처음에는. "이 캐릭터 누구예요?" 3초 안에 대답 나와야 한다. 실루엣만 봐도. "원거리 딜러요." "어떻게 알았어요?" "활 들고 있고 몸이 날씬해서요." 이게 답이다. "갑옷 디테일이 어쩌고..." "벨트 버클이 이렇고..." 이런 말 안 나와야 한다. 실루엣이 먼저다. 기획팀 입장 이해한다. 캐릭터 20개 넘는다. 실루엣 비슷하면 플레이어가 헷갈린다. "근데 디자 님, 이거랑 이거 구별 안 되는데요." 두 캐릭터 보여준다. 하나는 내 거. 하나는 3개월 전에 나온 거. 실루엣 똑같다. 디테일만 다르다. 리젝 당연하다. 아직도 어려운 것 5년 차인데 아직도 실수한다. 디테일 작업하다 보면 실루엣 까먹는다. 2시간 그리면 빠진다. 디테일 늪에. "여기 주름 하나 더." "이 금속 질감 더 살려야지." 그러다 실루엣 망가진다. 알람 맞춘다. 30분마다. 울리면 실루엣 체크한다. 검은색 채우기. 5초 걸린다. 근데 귀찮다. 알람 끈다. 또 잊어먹는다. 마감 전날에 깨닫는다. "아, 실루엣." 그때는 늦었다. 처음부터 다시 그린다. 밤 새운다. 언제쯤 자동으로 될까. 실루엣이 손에 배는 날이. 선배의 5분 러프 요즘 이해된다. 선배가 5분 만에 그린 그 러프. 디테일 없었다. 선 몇 개. 색칠도 대충. 근데 실루엣은 완벽했다. 포즈도 명확했다. 캐릭터 성격도 보였다. "이거 괜찮은데요. 이걸로 진행하시죠." 기획팀이 바로 OK 했다. 나는 그때 화났다. 내가 3일 그린 건 왜 떨어졌나. 지금은 안다. 선배는 실루엣부터 그렸다. 나는 디테일부터 그렸다. 순서가 달랐다. 게임 원화는 일러스트가 아니다. 예쁜 그림 그리는 게 아니다. 3cm로 축소돼도 살아있는 디자인. 그게 게임 컨셉이다. 채택률이 오른 이유 요즘 채택률 60% 넘는다. 3개월 전보다 2배다. 디테일 실력은 그대로다. 손 더 빨라진 것도 아니다. 바뀐 건 하나. 실루엣부터 그린다. 러프 단계에서 10개 그린다. 디테일 없이. 실루엣만 보고 5개 지운다. 남은 5개 기획팀 보여준다. "이 중에 뭐가 좋아요?" 2개 고른다. 그것만 디테일 작업한다. 시간도 아낀다. 전에는 10개 다 디테일 넣었다. 일주일 걸렸다. 채택은 1개. 지금은 2개만 디테일. 2일 걸린다. 채택은 1~2개. 효율이 3배다. AI한테 안 지려면 요즘 AI 그림 무섭다. 디테일은 사람보다 낫다. 근데 실루엣은 약하다. 프롬프트로 실루엣 조절 어렵다. 포즈도 애매하다. 게임 컨셉 아트는 실루엣이다. 여기서 사람이 이긴다. AI는 예쁜 그림 그린다. 근데 게임 캐릭터는 못 그린다. 아직은. 실루엣 훈련 더 해야겠다. 여기가 살길이다. 손 빠른 건 AI가 이긴다. 디테일도 진다. 근데 디자인은 아직 사람이다. 실루엣 감각. 캐릭터 구별. 포즈 명확성. 이게 원화가의 영역이다. 당분간은. 내일 할 것 신규 캐릭터 5개 의뢰 들어왔다. 마감은 다음 주. 예전 같으면 바로 디테일 들어갔다. 지금은 다르다. 내일 오전: 실루엣 러프 25개 (5개×5버전) 내일 오후: 팀 리뷰, 5개 선정 모레: 선정된 5개 포즈 테스트 다음 주 월화수: 디테일 작업 목요일: 최종 제출 실루엣 작업 비중이 30%다. 전에는 10%였다. 시간 배분이 바뀌었다. 결과도 바뀔 거다. 떨어지는 컨셉 줄이고 싶다. 밤새우는 날 줄이고 싶다. 실루엣이 답이다. 5년 차에 깨달았다. 늦었지만 다행이다.태블릿 끄고 손목 돌린다. 내일은 실루엣부터. 디테일은 나중에. 이게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