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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에게 게임 원화 일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여자친구에게 게임 원화 일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어제 뭐 했어? "어제 뭐 했어?" 여자친구가 묻는다. 나는 하루 종일 엘프 도적 캐릭터의 가슴 크기를 조정했다. 기획팀장이 "좀 더 섹시하게"라고 했고, 아트디렉터는 "너무 야하면 안 돼"라고 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정답이 있다. "응, 캐릭터 디자인했어." 대답은 간단하다. 실제로는 복잡하다.사실 오늘도 비슷했다. 신규 여전사 캐릭터 의상 수정. "허벅지 노출 더 늘려주세요." 기획팀 피드백이다. 리비전 4차다. 여자친구에게 뭐라고 말하지? "오늘은 의상 디자인 수정했어." 틀린 말은 아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번역의 어려움 게임 업계는 외계어를 쓴다. "이번 SSR 캐릭 일러, 가챠 확률 0.5%니까 완전 고퀄로 뽑아야 해요. 스킨톤은 따뜻하게, 눈빛은 쿨하게. 아 그리고 유저들 민원 있으니까 가슴은 적당히만." 이걸 일반인 언어로 번역하면? "음... 중요한 캐릭터 그림 그리는데, 색감이랑 분위기 맞춰야 해." 정보의 90%가 증발한다.여자친구는 대기업 인사팀이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다룬다. 그녀의 하루는 설명 가능하다. "오늘 신입 면접 봤어. 5명 중 2명 괜찮았어. 보고서 3개 썼고." 명확하다. 깔끔하다. 내 하루는? "캐릭터 러프 10개 그렸는데 다 엎어졌어. 기획 바뀌어서. 내일 또 그려야 해." 그녀가 묻는다. "왜 엎어졌는데?" "음... 방향이 바뀌어서." "무슨 방향?" "...게임 콘셉트?" 대화가 멈춘다. 민망한 것들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건 '섹시 컷'이다. 지난주 금요일. 신규 캐릭터 일러스트 최종 검수. 운영팀에서 요청이 왔다. "가슴 골 그림자 좀 더 진하게 해주세요. 매출 관련해서요." 나는 그림자를 진하게 그렸다. 5년 차 전문가답게 자연스럽게. 퇴근길 전화. "오늘 뭐 했어?" "...캐릭터 디테일 작업." "힘들었어?" "응, 좀."거짓말은 아니다. 일부만 말한 거다. 여자친구가 우리 회사 게임을 한 적이 있다. 한 달 정도. 내가 그린 캐릭터도 봤을 것이다. 그녀는 뭐라고 했지? "캐릭터들 다 왜 이렇게 옷이 없어?" 나는 웃으며 넘겼다. "뭐, 게임이 그렇지." 실제로는 내가 그 '옷 없는' 캐릭터를 그렸다. 기획서대로. 시장 트렌드대로. 업계 밈은 번역 불가 점심시간. 팀원들끼리 얘기한다. "이번 캐릭 완전 렌더링 지옥이다." "알지. 머리카락 레이어만 50개." "근데 유저들 반응 좋던데? '엄마 저거 뽑고 싶어요' ㅋㅋ" "당연하지. OO님 그림인데." 우리는 웃는다. 내부자 농담이다. 여자친구 회사 점심시간은 다르다. "오늘 팀장님이 또..." "인사고과 시즌이라 다들 예민해." "커피 마시러 갈래?" 정상적이다. 사회적이다. 우리 대화를 그녀에게 번역하면? "업무가 복잡해서 동료들이랑 스트레스 풀었어." 뉘앙스가 전부 사라진다. 업계 밈은 더하다. "이거 완전 OOO 작가 스타일인데?" "ㅇㅈ. 눈 그리는 거 똑같음." "근데 우리 게임에서는 못 쓰지. 유저들이 바로 캐치함." 이 대화를 외부인에게 설명할 수 있나? 불가능하다. 자동 검열 시스템 이제는 자동이다. 여자친구가 "오늘 회사 어땠어?"라고 물으면, 내 뇌에서 검열이 작동한다. 실제: "오늘 하루 종일 여캐 엉덩이 각도 조정했다. 리비전 7차." 출력: "캐릭터 포즈 작업했어. 좀 힘들었어." 실제: "기획팀이 '가슴 물리 엔진 더 풍부하게'래." 출력: "캐릭터 움직임 자연스럽게 만드는 중이야." 실제: "오늘 수영복 스킨 5벌 그렸다. 여름 이벤트용." 출력: "이벤트 일러스트 작업 중." 5년 하다 보니 능숙해졌다. 거짓말은 아니고, 진실의 일부만. 죄책감? 조금. 필요성? 확실. 그녀가 알면 안 되는 것들 작년 크리스마스. 여자친구가 선물을 줬다. 와콤 타블렛 펜심 세트. "네가 맨날 그림 그리니까. 도움될까 싶어서." 고마웠다. 진심으로. 그 펜심으로 나는 무엇을 그렸나?속옷 차림 여전사 컨셉 8종 수영복 마법사 일러스트 (한정판) 노출도 높은 암살자 스킨 디자인그녀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문제는 포트폴리오다. 이직 준비 중이다. 포트폴리오 정리하는데, 여자친구가 옆에서 봤다. "와, 그림 진짜 잘 그린다. 근데 왜 다 여자야?" "...게임 캐릭터가 보통 여자가 많아서." "옷은 왜 이래?" "게임 특성상..." "네가 이런 걸 그리는 줄 몰랐네." 그녀 목소리에 뭔가 있었다. 실망? 의아함?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뭐라고 변명하지? "이게 내 직업이야. 시장이 원하는 걸 그리는 거야." 사실이다. 하지만 공허하다. 업계 사람들끼리는 다르다 동료 원화가 형이 있다. 7년 차. 결혼했다. 아내도 게임 회사 기획자다. "좋겠다. 집에서 일 얘기 마음껏 하겠네." "ㅇㅇ. 리비전 지옥 얘기해도 이해함." 부럽다. 지난달 회식 때 들은 얘기. "우리 와이프가 그러는데, '당신 회사에서 뭐 하는지 잘 모르겠어'래." 팀원들이 공감했다. "ㅇㅈ. 설명 못 함." "설명하면 더 이상해짐." "그냥 '그림 그린다'고만 함." 다들 같은 고민이다. 업계 사람끼리 만나면 다르다. 설명 필요 없다. "이번 프로젝트 어때?" "리비전 지옥." "ㅋㅋㅋ 알지." 끝이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안다. 포기한 것들 이제는 포기했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여자친구는 내가:게임 회사에서 캐릭터 그림을 그리고 가끔 야근한다이 정도만 안다. 충분하다. 나머지는?하루에 가슴 크기 조정 몇 번 하는지 '더 섹시하게' 피드백 받는 게 일상인지 유저들이 '엄마 이거 뽑고 싶어요' 하는 캐릭터를 기획하는지몰라도 된다. 아니, 모르는 게 낫다. 죄책감은 점점 줄어든다. 이게 내 직업이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설명하기 복잡할 뿐. 그래도 괜찮은 이유 여자친구는 내 그림을 좋아한다. 가끔 개인 작업 보여주면 좋아한다. 팬아트 같은 거. 풍경화 같은 거. "이건 정말 예쁘다. 이런 그림 더 그려." 나는 웃는다. "응, 시간 나면." 회사에서 그리는 그림과 개인 작업은 다르다. 그녀는 후자만 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직업과 정체성은 별개다. 나는 게임 원화가지만, 그게 나의 전부는 아니다. 여자친구에게 내 직업을 100% 설명할 수 없다. 괜찮다. 그녀는 나를 이해한다. 내 직업이 아니라, 나를. 결국 "오늘 뭐 했어?" "캐릭터 디자인." "힘들었어?" "응, 좀." "수고했어." 이 대화면 된다. 나머지 디테일 – 가슴 크기, 허벅지 각도, 섹시 컷, 리비전 7차, 기획팀 피드백 – 은 내 몫이다. 5년 차 게임 원화가. 29살 남자. 비업계 여자친구.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일한다. 그래도 같은 집에 산다. 완벽한 이해? 불가능하다. 편안한 거리? 가능하다. 그걸로 충분하다.오늘도 캐릭터 리비전. 내일도. 여자친구는 모른다. 알 필요 없다. 그냥 "수고했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