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왔을 때 펜을 드는 게 무섭다는 건
- 26 Dec, 2025
펜을 드는 게 무섭다
번아웃이 왔다는 걸 처음 안 건 트위터 팔로워가 물어봤을 때다.
“요즘 팬아트 안 올리시네요?”
3개월째 개인 그림을 한 장도 안 그렸다. 회사 작업은 했다. 마감도 맞췄다.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오면 타블렛을 못 켰다.

아침 7시 반에 일어난다. 씻고 9시 반 출근. 회사 도착하면 포토샵 켠다. 레퍼런스 찾는다. 러프 그린다. 기획팀이랑 미팅한다. 수정한다. 또 수정한다.
점심 먹고 디테일 작업. 아트디렉터 리뷰. 수정. 팀원들 작업 코멘트. 저녁 7시. 퇴근.
집 와서 침대에 눕는다. 타블렛 본다. 펜 잡으려다 놓는다. 유튜브 본다. 자야지. 내일도 출근.
회사 그림은 그려지는데
이상한 건 회사 작업은 된다는 거다.
신규 캐릭터 컨셉 5종. 이번 주 금요일까지. 기획서 받아서 레퍼런스 모으고 러프 뽑는다. 손은 움직인다. 마감은 지키는데.
왜 개인 작업은 안 되지?

펜을 들면 생각이 든다.
“이거 그려서 뭐해.” “트위터에 올려도 반응 없으면.” “회사 그림도 지긋지긋한데.” “내 그림체가 맘에 안 들어.”
그림 그리는 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대학 때는 밤새 그렸다. 취미 일러스트 의뢰 받으면 신났다. 트위터에 낙서 올리는 게 좋았다.
지금은 타블렛 여는 게 숙제 같다.
아니, 숙제보다 무섭다. 숙제는 하면 끝인데 이건 끝이 없어서.
자책의 루프
제일 힘든 건 자책이다.
“다른 사람들은 회사 다니면서도 그림 그리는데.”
트위터 타임라인 본다. 동기는 개인 작업 꾸준히 올린다. 후배는 커미션도 받는다. 선배는 회사 다니면서 동인지 낸다.
나만 못하는 것 같다.

“5년차면 이 정도는 해야지.” “프로인데 이래서 되나.” “작년엔 그렸잖아.”
자책하면서도 손은 안 간다. 악순환.
회사 작업할 땐 괜찮다가도 개인 작업 생각하면 막힌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고. 그려도 만족 안 될 것 같고. 완성 못 할 것 같고.
그냥 안 그리는 게 편하다.
근데 안 그리면 또 죄책감 든다.
동료가 물었다
팀 막내가 물어봤다.
“선배님, 개인 작업 어떻게 시간 내세요?”
“요즘 잘 안 해.”
“네? 트위터 보면 그림 엄청 많이 올리셨던데요.”
“작년까지 얘기야.”
막내가 놀란 표정 지었다. 5년차 선배가 번아웃이라니. 근데 나도 놀랐다. 내가 그렇게 됐다니.
점심 먹으면서 선배랑 얘기했다.
“저 요즘 개인 작업이 안 돼요.”
“나도 그럴 때 있어.”
“어떻게 해요?”
“안 그려. 그냥.”
선배는 담담했다.
“억지로 그리면 더 싫어져. 나중엔 회사 작업도 싫어지거든. 그냥 좀 쉬어.”
“근데 안 그리면 실력이 떨어질 것 같아요.”
“3개월 쉰다고 떨어지나. 넌 5년 그렸잖아.”
맞는 말인데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려야 한다는 강박
프로 작가는 매일 그려야 한다.
어디서 들은 말이다. 유튜브였나. 트위터였나. 아무튼 그렇게 믿었다.
하루라도 안 그리면 불안했다. 근데 지금은 한 달째 안 그린다. 불안하다. 근데 그린다고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그림 안 그려?”
“응.”
“힘들어?”
“그냥 손이 안 가.”
“쉬는 거지 뭐.”
여자친구는 비업계라 이해 못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했다.
“너 회사에서 매일 그리잖아. 그것도 일이야. 퇴근하고까지 그려야 돼?”
“그게 아니라…”
“쉬고 싶으면 쉬어. 취미도 의무 아니잖아.”
취미. 맞다. 원래 취미였다.
언제부터 의무가 됐지?
회사 그림과 내 그림
회사에서 그리는 건 회사 그림이다. 당연한 말인데 잊고 있었다.
내 기획 아니다. 내 캐릭터 아니다. 내 세계관 아니다. 클라이언트는 유저고 팀이고 회사다.
물론 애정은 간다. 내가 그렸으니까. 근데 내 그림은 아니다.
개인 작업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그림이어야 한다고. 내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부담됐나 보다.
회사에서 이미 8시간 그린다. 다른 사람 기획에 맞춰서. 리비전 받아가면서.
퇴근하고 또 그려야 한다. 이번엔 내 기준으로. 내 만족으로. 트위터 반응까지 신경 쓰면서.
지칠 만도 하다.
그림을 안 그린 3개월
3개월 동안 개인 그림을 안 그렸다.
회사 작업만 했다. 퇴근하면 유튜브 보고 게임했다. 주말엔 늦잠 자고 여자친구 만났다.
처음엔 불안했다. 한 달 지나니까 무뎌졌다. 두 달 지나니까 편했다.
트위터는 안 봤다. 타임라인 보면 다들 그림 올리는 것 같아서.
그림 생각은 했다. 가끔. 출근길에 보는 풍경이라든지. 점심 먹으면서 본 고양이라든지.
‘저거 그리면 예쁘겠다’ 생각만 했다. 그리진 않았다.
신기한 건 회사 작업이 조금 나아진 것이다.
리비전이 줄었다. 컨셉이 한 번에 통과됐다. 아트디렉터가 칭찬했다.
“요즘 그림 좋아졌네?”
나도 모르겠다. 뭐가 달라진 건지.
어느 날 손이 갔다
3개월 반쯤 지났을 때다.
퇴근하고 집에 왔다.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폰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생각났다. 오늘 점심 때 본 고양이.
타블렛 켰다. 클립 스튜디오 열었다. 새 캔버스.
러프로 고양이 그렸다. 30분쯤?
완성은 안 했다. 러프만 그리고 껐다.
근데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그냥 그렸다. 누가 보라고도 아니고. 올리려고도 아니고. 완성하려고도 아니고.
그냥 그림.
회복은 천천히
그 다음 주에 또 그렸다. 역시 러프만.
일주일에 한두 번. 러프만. 30분씩.
완성은 안 했다. 완성하려면 또 부담될 것 같아서.
한 달쯤 그렸더니 자연스럽게 디테일도 들어갔다. 완성까지는 아니고 중간쯤?
그림 그리는 게 조금 편해졌다.
트위터는 아직 안 올린다. 올려도 되는데 굳이 안 올린다. 반응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나를 위해 그린다. 그리고 싶어서 그린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다시 배웠다.
5년 전엔 알았던 건데 잊고 있었다.
번아웃을 겪고 나서
지금은 일주일에 서너 번 그린다. 적당히. 부담 없이.
완성작도 가끔 나온다. 완성 안 해도 괜찮다는 걸 알고 나니까 오히려 완성이 된다.
트위터엔 한 달에 한두 번 올린다. 올릴 만한 게 생기면.
팔로워는 줄었다. 7500명쯤? 괜찮다. 내가 즐거우면 된다.
회사 작업도 여전히 한다. 마감도 지킨다. 근데 이제 안다.
회사 그림은 회사 그림이다. 내 그림은 내 그림이다. 둘은 다르다. 둘 다 중요하지만 섞이면 안 된다.
퇴근하고 안 그려도 괜찮다. 프로는 매일 안 그려도 된다. 5년간 쌓인 건 3개월 쉰다고 안 없어진다.
그림은 의무가 아니다. 원래 좋아서 시작한 거다.
번아웃이 온 사람에게
지금 번아웃이면 쉬어도 된다.
억지로 그리지 마. 더 싫어진다.
회사 작업만 해도 괜찮다. 그것도 그림이다.
“개인 작업 안 하면 실력 떨어진다”는 거짓말이다. 5년 그린 사람이 3개월 쉰다고 떨어지나.
트위터 끄고 폰 내려놔. 남들 그림 보면 조급해진다.
여자친구 말이 맞았다. 취미는 의무가 아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다시 그리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그 순간은 온다. 억지로 안 만들어도 온다.
나한테 왔으니까.
지금은
요즘 그림 그리는 게 좋다. 다시.
회사에선 회사 그림. 집에선 내 그림. 구분이 확실해졌다.
개인 작업이 부담 안 된다. 그리고 싶으면 그린다. 아니면 안 그린다.
간단하다.
타블렛 여는 게 무섭지 않다. 펜을 드는 게 부담 안 된다.
5년 전 처음 그림 그릴 때처럼은 아니다. 근데 괜찮다. 그때랑 지금은 다르니까.
지금은 쉬는 것도 안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번아웃은 끝이 아니다. 쉬어가는 구간이다.
펜을 드는 게 무서울 땐, 안 들어도 된다는 걸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