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스케치 단계에서 요구하는 디테일은 모순이다

러프 스케치 단계에서 요구하는 디테일은 모순이다

러프에 디테일을 달라니

회의실에 들어갔다. 기획팀 3명, 아트팀장, 나. “이번 신규 캐릭터 컨셉 보겠습니다.”

프로젝터에 내 러프를 띄웠다. 실루엣 3종, 각 20분씩 그렸다. 러프니까.

기획팀장이 말했다. “표정이 더 보고 싶은데요.” “러프 단계라 아직…” “그리고 이 의상 주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디테일은 채택된 안으로 넘어가서…” “손에 든 무기도 좀 더 구체적으로요. 이게 검인지 창인지.”

러프 스케치 회의가 2시간 걸렸다. 결론: 3안 다 다시. 더 구체적으로.

러프의 정의부터 다시

퇴근길에 동기한테 톡했다. “러프가 뭐라고 생각해?” “빠르게 여러 방향 제시하는 거지.” “맞지?”

러프는 방향성이다. A냐 B냐 C냐. 큰 실루엣, 컬러 톤, 느낌. 디테일은 방향 정해진 다음이다. 당연한 얘기다.

근데 기획은 러프 단계에서 완성본을 원한다. 표정, 주름, 장신구, 무기 형태, 심지어 “이 천 재질이 뭐예요?” 이런 질문까지.

그럼 그냥 완성본 그리라는 건데.

완성본을 3개 그리면 뭐가 문제냐. 시간이다. 러프 하나에 20분. 완성본 하나에 8시간. 3개면 24시간 vs 1시간. 차이가 24배다.

24배 시간 써서 3개 다 버려지면 어쩔 건데. 기획은 “아 이 방향 아닌 것 같아요” 하면 끝이지만, 나는 3일 날아간다.

요구의 구조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봤다.

기획은 불안하다. 러프만 보고 결정하기 무섭다. “이게 완성되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 말 자주 듣는다.

그래서 러프 단계에서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한다. 완성본에 가까울수록 안심이 된다. 이해는 간다.

근데 그게 아티스트의 일을 24배로 늘린다는 걸 모른다. 아니, 알아도 “그래도 필요한데요”라고 한다.

회사 구조도 한몫한다. 기획팀장이 위에 보고할 때 러프보다 완성본 같은 게 좋다. 위에서도 “이게 뭐야, 낙서네”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

결국 아트팀이 그 시간을 다 메운다. 우리 야근으로.

팀장한테 얘기했다. “러프 기준 다시 정해야 하지 않나요.” “알아. 근데 기획이 저러는데 어떡해.” “기준이 없으니까 저러는 거잖아요.” “다음 프로젝트 때 정리해보자.”

다음 프로젝트. 언제인지 모른다. 지금 프로젝트는 계속 돌아간다.

디테일의 시간

집에 와서 계산했다.

러프 3안 → 각 20분 → 1시간 수정 요구 → 디테일 추가 → 각 3시간 → 9시간 총 10시간

정상 프로세스: 러프 3안 → 1시간 선택 1안 → 완성 8시간 총 9시간

1시간 차이? 아니다.

3안 다 디테일하게 그리면, 안 쓰이는 2안의 6시간은 그냥 증발한다. 그 6시간에 다른 캐릭터 러프 18개를 그릴 수 있다. 다음 프로젝트 사전 작업을 할 수 있다. 개인 포폴을 만들 수 있다.

근데 그냥 사라진다. “아 이 안 아니네요” 한마디에.

이게 한 달에 2번, 3번 쌓이면 일정이 밀린다. 밀리면 야근한다. 야근하면 다음 작업 퀄리티 떨어진다. 떨어지면 수정 들어온다. 또 야근한다.

악순환이다.

표준이 없다

문제는 회사마다, 프로젝트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거다.

예전 회사는 러프 정말 러프했다. 막대기 인간도 통과됐다. 실루엣만 보는 거니까. 지금 회사는 러프에 음영 넣고 컬러 넣고 표정 넣으라고 한다. 그럼 그게 러프냐.

해외 아트북 보면 정말 막대기 러프 많다. 그걸로 방향 잡고, 선택된 안 하나만 완성도 높인다. 당연한 프로세스다.

근데 한국 게임 회사는 모든 단계에 완성도를 요구한다. 러프도 완성도, 1차 완성도 더 높게, 2차 완성도 더더 높게. 끝이 없다.

신입이 물어봤다. “러프는 어느 정도로 그려야 해요?” “음… 케바케.” “기준이 없어요?” “응. 기획 성향 따라가.”

이게 답이라는 게 웃긴다.

요청의 번역

기획이 원하는 걸 번역해봤다.

“디테일 더 주세요” → “이걸로 위에 보고해야 하는데 민망해요” “표정 보고 싶어요” → “캐릭터 감정선을 러프로는 못 읽겠어요” “무기 형태 구체적으로” → “모호하면 나중에 책임 소재 애매해요”

다 이해한다. 진짜로.

근데 그럼 처음부터 “완성본 3개 주세요”라고 하면 안 되나. 러프 회의라고 해놓고 완성본 요구하지 말고.

시간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러프면 이틀, 완성본이면 일주일. 근데 “러프요~” 하길래 이틀 잡았는데 “디테일이요~” 하면 일주일 일을 이틀에 해야 한다.

불가능하면 야근이다. 주말 출근이다. “원래 게임 업계가 이래” 이런 소리 듣는다.

아니다. 프로세스 문제다.

선배의 조언

점심 때 선배한테 물었다. 10년차다.

“형은 어떻게 해요?” “러프 요청 오면 일단 디테일하게 그려.” “그럼 시간 엄청 걸리잖아요.” “응. 근데 한 번에 통과되면 수정 안 해도 돼.” “안 통과되면요?” “그땐… 운이 없는 거지.”

허탈했다.

다른 선배는 달랐다. 7년차.

“나는 진짜 러프만 줘. 막대기 수준.” “기획이 뭐라 안 해요?” “해. 근데 ‘러프니까요’ 하고 버텨. 선택되면 그때 그려.” “통과돼요?” “반반. 근데 내 시간은 지킨다.”

방법론이 사람마다 다르다.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중간쯤 한다. 러프보단 디테일하게, 완성본보단 덜. 그래도 “좀 더”를 듣는다. 끝이 없다.

아티스트의 책임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잘못도 있다.

아티스트가 러프를 대충 그려서 문제가 생긴 적도 있다. “이 느낌으로 가요” 했는데 완성본이 180도 달랐다. 기획이 뒤집어졌다. “러프에서 이런 느낌 아니었잖아요.”

그럼 기획 입장에선 러프를 못 믿는다. “완성본 나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이 말이 나온다.

신뢰의 문제다.

아트팀이 러프로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고, 완성본에서 그 방향을 유지하면 기획도 안심한다. 근데 그게 항상 되는 건 아니다. 완성 과정에서 느낌이 바뀐다. 더 좋게 하려다 보면 원래 방향에서 벗어난다.

그럼 또 수정이다.

결국 기획은 러프 단계에서 최대한 확정하려 한다. “여기 이거 이렇게 가는 거 확실해요?” “표정은 이대로 확정이에요?”

확정은 완성본에서 해야 하는데, 러프에서 확정하려 한다. 모순이다.

회사의 시스템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러프 → 1차 완성 → 2차 완성 → 최종 완성 이렇게 4단계를 거치는데, 각 단계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러프는 뭘 보여줘야 하나. 실루엣? 컬러? 표정? 디테일? 회사가 정해줘야 한다. 근데 안 한다.

“알아서 해” “상황 봐서” “유연하게” 이런 말만 들린다.

그럼 아티스트는 불안하다. 덜 그리면 “성의 없다”, 많이 그리면 시간 낭비. 중간은 어디냐. 모른다.

기획도 불안하다. 러프로 결정하기 무섭다. 완성본 나오면 다를까봐.

둘 다 불안하니까 안전하게 간다. 러프를 완성본처럼. 시간이 두 배로.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러프 단계 기준을 명확히 정하고, 기획도 아트도 그걸 따라야 한다.

근데 누가 바꾸나. 위에서 안 바꾸면 안 바뀐다.

타협점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시스템 안 바뀐다. 당분간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1. 러프 수준 미리 확인 회의 전에 물어본다. “이번 러프는 어느 정도 디테일 원하세요?” 애매한 답 오면 예시 보여준다. “이 정도요? 아님 이 정도요?” 확실히 하고 시작한다.

  2. 시간 명확히 전달 “러프 3개면 하루, 디테일 추가하면 3일 걸립니다.” 숫자로 말한다. 감으로 하지 않는다.

  3.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 일정에 이 퀄리티는 불가능합니다.” 팀장 통해서라도 전달한다. 죽어라 하다가 번아웃 오는 것보단 낫다.

  4. 러프 단계 기록 러프 보여줄 때 “이건 러프입니다. 완성본과 30% 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명시한다. 나중에 “러프랑 다르잖아요” 하면 “러프니까요” 할 수 있게.

완벽하진 않다. 근데 안 하는 것보단 낫다.

이상과 현실

이상적으로는 이렇다.

러프는 5분. 10개 그린다. 방향 10개. 기획이 3개 고른다. 그 3개만 20분씩 디테일 러프. 1개 선택. 그것만 8시간 완성.

총 시간: 5분x10 + 20분x3 + 8시간 = 9시간 50분 산출물: 완성본 1개, 과정 명확

현실은 이렇다.

러프 3개 그린다. 각 3시간씩. 기획이 “다 아닌 것 같아요” 한다. 3개 더 그린다. 각 3시간씩. “1번이랑 4번 섞어주세요” 한다. 섞는다. 4시간. “표정을 좀 더” 한다. 수정한다. 2시간. 겨우 완성본 작업 시작. 8시간.

총 시간: 3x6 + 4 + 2 + 8 = 32시간 산출물: 완성본 1개, 과정 지옥

3배 넘게 걸렸다. 같은 결과물에.

차이는 프로세스다. 기준이 없으니까 이렇게 된다.

결론 아닌 결론

오늘도 러프 회의가 있다. 3시.

러프 3개 준비했다. 각 1시간씩 걸렸다. 러프치곤 디테일하다. 표정, 주름, 무기 형태 다 들어갔다.

그래도 “좀 더”를 들을 것 같다.

이게 모순이라는 걸 안다. 회사도 안다. 기획도 안다. 근데 안 바뀐다.

언젠가 바뀔까. AI가 러프를 1초에 100개 그려주면 바뀔까. 아니면 아티스트가 다 번아웃으로 쓰러져야 바뀔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3시 회의 준비한다. 커피 한 잔 더 마신다. “좀 더” 들으면 “네” 한다.

그렇게 오늘도 돌아간다.


러프는 러프여야 하는데, 완성본이 되어버린다. 그 사이 시간이 증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