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Dec, 2025
캐릭터를 '좀 더 섹시하게' 달라는 요청의 심리 분석
오전 10시 47분, 슬랙 알림 회의실에서 돌아왔다. 기획팀장이 던진 말 하나. "이 캐릭터, 좀 더 섹시하게 해주세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내렸다. 화면에는 내가 사흘 밤낮 그린 여전사 컨셉이 떠 있다. 갑옷 입고 검 든 캐릭터. 나름 멋있게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손이 안 움직인다. 섹시. 섹시하게. 더 섹시하게. 이 단어의 정의가 뭔지 아는 사람 있나.섹시의 52가지 정의 일단 레퍼런스부터 찾았다. 아트스테이션에 'sexy character' 검색. 나오는 건 죄다 다르다. 어떤 건 노출이 많다. 어떤 건 포즈가 야하다. 어떤 건 그냥 얼굴이 예쁘다. 우리 팀장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슬랙에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3분. "팀장님, 섹시의 방향성이 어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노출도를 높이는 건지, 실루엣을 강조하는 건지, 아니면 포즈나 표정 쪽인지..." 답장이 왔다. 7분 후. "음... 그냥 좀 더 매력적으로요. 느낌 아시죠?" 모른다. 전혀 모른다. '느낌 아시죠'는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오후 2시, 첫 번째 시도 일단 그려봤다. 허벅지를 좀 더 드러냈다. 갑옷 하의를 짧게. 어깨 갑옷도 좀 줄이고. 30분 작업. 팀 리뷰에 올렸다. 기획팀장: "음... 이건 좀 야한 것 같은데요?" 나: "...?" 아까 섹시하게 하라며. 기획팀장: "섹시한 건 맞는데, 너무 노골적이면 유저들이 거부감 느낄 수도 있잖아요." 손이 멈췄다. 그럼 대체 어느 선이냐고. "좀 더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요." 우아. 섹시. 우아하면서 섹시. 모순 아닌가. 저장도 안 하고 레이어 삭제했다. 오후 4시, 두 번째 시도 이번엔 포즈를 바꿨다. S라인을 강조한 포즈. 허리를 꺾고 가슴을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전형적인 '섹시 포즈'다. 핀터레스트에서 100번은 본 구도. 그리면서도 찝찝했다. 이 자세로 싸우면 허리 나간다. 하지만 일단 그렸다. 1시간 반. 팀 채널에 올렸다. 아트 디렉터가 답했다. "포즈가 너무 어색해요.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자연스러운 섹시 포즈. 이게 뭔 말인지 아는 사람.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철학자가 아니다.섹시 요청의 심리학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섹시하게'라고 말할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첫째, 본인도 모른다. 그냥 지금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를 때. "좀 더 섹시하게"라고 하면 그럴싸해 보인다. 둘째, 책임 회피다. "노출 늘려주세요"라고 하면 나중에 문제 생길 때 본인 말이 된다. "섹시하게"는 애매해서 책임 안 진다. 셋째, 성적 매력을 직접 언급하기 민망하다. 회사에서 "가슴을 더 크게", "다리를 더 길게" 이런 말 못 한다. HR 들어가면 끝이다. 그래서 '섹시'라는 완곡어법을 쓴다. 결국 나는 마인드 리더가 되어야 한다. 아트 디렉터가 아니라 심리학자. 대학에서 인체 해부학은 배웠는데 심리학은 안 배웠다. 오후 6시, 질문의 용기 참다가 물어봤다. 회의실에 기획팀장 불렀다. "팀장님, 죄송한데요. '섹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어색한 침묵. 3초 정도. "아... 그러니까... 음..." 팀장도 모른다. 확신했다. "예를 들어, 레퍼런스 같은 거 있으세요? 이런 느낌이다 하는." "아... 레퍼런스요... 음..." 핸드폰을 꺼내더니 게임 몇 개 보여줬다. 다 다른 스타일이었다. 검은사막, 니어 오토마타, 페르소나. "이런 느낌들이요." 이 셋의 공통점을 찾으라는 건가. 그냥 "예쁜 여캐"가 공통점 아닌가. 하지만 뭔가 실마리는 잡혔다. "아, 그럼 실루엣이 살면서 의상이 타이트한 느낌인가요?" "네! 그거요! 그런 느낌!" 드디어. 30분 만에 하나 건졌다. [PROMPT_THUMBNAIL: anime style illustration, Korean male concept artist having discussion with team leader in meeting room, laptop showing various character designs, both looking at reference images on phone, soft office lighting, Studio Ghibli aesthetic, warm collaborative atmosphere, manga style, game development scene] 저녁 8시, 세 번째 시도 레퍼런스 보고 다시 그렸다. 갑옷은 유지하되 실루엣이 살도록. 타이트한 느낌. 몸의 라인을 따라가는 디자인. 노출은 줄이고 핏은 살렸다. 포즈도 자연스럽게. 싸우는 자세인데 역동적이고. 2시간 걸렸다. 팀 채널에 올렸다. 30분 후. 기획팀장: "오! 이거 좋은데요?" 아트 디렉터: "이 방향 괜찮습니다." 프로그래머: "멋있네요." 드디어. 겉으로는 "감사합니다"라고 쳤지만.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이걸 왜 처음부터 말 안 해. 밤 10시, 혼자 정리 퇴근하고 집에 왔다. 타블렛 앞에 앉았다. 개인 작업 하려고. 손이 안 움직인다. 오늘 하루 종일 그렸는데 또 그리기 싫다. 그냥 유튜브 켰다. 게임 원화 메이킹 영상. 댓글에 누가 썼다. "기획팀이 맨날 애매하게 지시해서 힘들어요 ㅠㅠ" 공감. 100% 공감.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원화가의 90%가 겪는 일이다. "더 멋있게", "더 예쁘게", "더 섹시하게". 형용사로 지시하는 사람들. 우리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애매한 형용사를 구체적인 시각 언어로. 그게 우리 일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그림 그리는 거고. 누가 미대 입시할 때 이런 거 알려주나. 실기 시험에 '애매한 지시 번역하기' 과목 있나. 없다. 현장에서 깨진다. 섹시의 정답 결국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섹시의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노출이 섹시다. 어떤 사람은 신비로운 게 섹시다. 어떤 사람은 강한 여자가 섹시다. 어떤 사람은 청순한 게 섹시다. 기획팀장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냥 "뭔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 그걸 '섹시하게'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우리는 그 포장을 뜯어야 한다. 질문으로. "어떤 섹시함인가요?" "레퍼런스 있나요?" "이런 방향인가요, 저런 방향인가요?" 민망해도 물어야 한다. 안 물어보면 3번 그린다. 나처럼. 물어보면 1번 반에 끝난다. 시간은 돈이다. 내 저녁 시간도 돈이다. 내일 할 일 내일은 남자 캐릭터 컨셉 회의다. 이번엔 기획팀이 뭐라고 할까. "좀 더 간지나게 해주세요"? "더 카리스마 있게"? 벌써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 물어볼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인지 말씀해주세요." "레퍼런스 있으시면 공유해주세요." 5년 차면 이제 이 정도 배짱은 있다. 신입 때는 눈치 보느라 묻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애매한 지시를 그대로 받는 게 오히려 무책임이라는 걸. 명확하게 만드는 게 프로다. 타블렛 덮었다. 내일 또 싸운다. 애매한 형용사들과."섹시하게"는 지시가 아니다. 숙제 문제다. 정답은 대화로 찾는다.
- 09 Dec, 2025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 팀장님이 이미 3개의 피드백을 준 상황
월요일 오전 10시, 피드백 3개 금요일 저녁의 착각 금요일 오후 6시. 컨셉 3개 업로드했다. 전사 캐릭터 A안, B안, C안. 팀장님께 슬랙 드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7시에 퇴근했다. 주말 동안 피드백 올 거다. 월요일 아침에 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토요일은 여자친구랑 영화 봤다. 일요일은 개인 작업했다. 판타지 기사 팬아트. 트위터에 올렸더니 좋아요 300개 넘게 받았다. 기분 좋게 잤다. 월요일은 가볍게 수정 작업만 하면 되겠지.월요일 오전 9시 50분 지하철에서 슬랙 켰다. 팀장님 메시지. 어젯밤 11시. "디자님, 주말에 기획팀이랑 얘기했는데요." 심장이 내려갔다. "컨셉 방향 조금 바뀌었어요. 월요일 아침에 얘기해요." 아침에 얘기하자는 건 길다는 뜻이다. 조금 바뀌었다는 건 많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지하철 안. 사람들 많다. 나만 식은땀 났다. 10시 정각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 켰다. 슬랙에 팀장님 호출. "디자님, 회의실 1분만요." 커피도 못 마셨다. 회의실. 팀장님, 기획팀장님, 아트디렉터님. 셋이 앉아 있다. "앉으세요. 금요일 컨셉들 잘 봤어요." 잘 봤다는 말 뒤에는 항상 '그런데'가 온다. "그런데 주말에 PD님이 방향 바꾸자고 하셨어요."피드백 1: 컨셉 전체 "전사 컨셉인데, 너무 정통 판타지예요." A안, B안, C안 모두 정통 판타지다. 기획서에 '중세 유럽 느낌의 전사'라고 써 있었다. "좀 더 현대적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사이버펑크 섞어서." 사이버펑크. 금요일에는 한 마디도 없었다. "갑옷은 유지하되, 네온 느낌? 그런 거요." 네온 갑옷.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간다. "레퍼런스 좀 찾아볼게요." "네, 급하니까 오늘 중으로 러프만 보여주세요." 오늘 중으로. 월요일 하루 만에. 피드백 2: 실루엣 "그리고 실루엣이 약해요. 멀리서 봤을 때 임팩트가 없어요." 아트디렉터님이 말씀하셨다. "어깨 라인 키우고, 무기 크게 가져가세요." 어깨 키우면 목이 파묻힌다. 무기 키우면 비율이 이상해진다. "근데 이 캐릭터 민첩형 아니었나요?" "맞는데, 민첩해 보이면서도 강해 보여야 해요." 민첩하면서 강하게. 가늘면서 굵게. 말은 쉽다. "네, 다시 잡아볼게요."피드백 3: 디테일 기획팀장님 차례. "벨트 부분이요, 너무 심플해요. 뭔가 스토리가 있는 아이템을 달았으면." 벨트에 스토리. "예를 들면 전쟁에서 얻은 트로피라던가, 가문의 문장이라던가." 디테일 추가하면 작업 시간 2배다. 러프에 그런 거까지 넣으라는 건가. "그리고 색감이 너무 차가워요. 따뜻하게 가면 안 될까요?" 따뜻한 사이버펑크. 모순 아닌가. "따뜻한 네온...? 오렌지 톤으로 가볼까요?" "그렇죠! 오렌지, 노란색 계열. 따뜻하면서도 미래적인." 미래는 차가운 거 아니었나. 회의 종료 30분 회의 끝. 메모장에 적은 것들.사이버펑크 + 중세 어깨 키우기 무기 크게 민첩하면서 강하게 벨트 스토리 디테일 따뜻한 네온이게 뭔 소린지 모르겠다. "오늘 6시까지 러프 3안 부탁드려요." 6시까지. 지금 10시 반. 점심 빼면 6시간. 한 안당 2시간. "네, 최선을 다해볼게요." 최선이 아니라 기적이 필요하다. 자리로 복귀 자리에 앉았다. 커피 식었다. 전자레인지 돌리러 가기 귀찮다. 슬랙에 같은 팀 선배가 물었다. "회의 어땠어?" "방향 바뀜. 처음부터." "ㅋㅋㅋ 월요일의 맛." 웃긴지 모르겠다. 레퍼런스 검색 시작. 'cyberpunk medieval armor' 'neon knight' 'futuristic warrior warm color' 나오는 건 다 AI 그림이다. 퀄리티는 좋다. 레퍼런스로 쓰기엔 애매하다. 아트스테이션 뒤적였다. 비슷한 컨셉 찾았다. 중국 아티스트 작품. 3년 전 거. 저장했다. 러프 작업 시작 11시. 1안 시작. 사이버펑크 감성을 갑옷에. 네온 라인을 어디에 넣을까. 어깨 갑옷? 가슴? 팔? 일단 다 넣어봤다. 크리스마스 트리 됐다. 지우고. 네온은 포인트만. 어깨 갑옷 테두리. 가슴 중앙 한 줄. 실루엣 키우려고 어깨 넓혔다. 목 파묻혔다. 목 길이 늘렸다. 이상해 보인다. 비율 다시 잡았다. 12시. 1안 러프 완성. 마음에 안 든다. 어쩔 수 없다. 점심시간 12시 반. 팀원들이랑 식당 갔다. 냉면 먹었다. 후배가 물었다. "형 컨셉 어떻게 돼요?" "응, 다시." "또요? 금요일 거 괜찮았는데." "기획 바뀜." "아..." 다들 안다. 이게 일상이라는 거. 선배가 말했다. "나도 지난주에 UI 7번 갈아엎었어." 위로가 안 된다. 모두가 고통받는다고 내 고통이 줄지 않는다. 오후 작업 1시 반. 2안 시작. 1안보다 어깨 더 키웠다. 망토 추가했다. 실루엣 임팩트용. 무기는 대검. 1안보다 크게. 등신 대비 1:1.5. 들기 힘들어 보인다. "민첩하면서 강하게." 말이 안 된다. 그래도 그려야 한다. 벨트 디테일. 작은 파우치 3개. 가문 문장 메달. 뭔가 걸려 있는 것들. 3시. 2안 러프 완성. 1안보다 낫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 3안, 마지막 3시 반. 마지막 안. 1안과 2안의 중간으로 갔다. 어깨는 적당히. 무기는 한 손 반 검. 네온은 최소화. 갑옷 이음새에만. 망토는 짧게. 허리까지만. 벨트는 심플하게. 디테일은 나중에. 색감은 오렌지 베이스. 따뜻한 느낌. 네온은 청록색. 대비 효과. 5시. 3안 완성. 세 개 놓고 봤다. 3안이 제일 무난하다. 무난한 게 채택된다. 업로드 5시 반. 컨셉 3개 업로드. 팀장님께 슬랙. "러프 3안 올렸습니다." 답장 바로 왔다. "확인할게요." 10분 뒤. "3안이 좋네요. 이 방향으로 디테일 들어가세요." 역시 3안. "내일 오전까지 디테일 작업 가능할까요?" 내일 오전. 오늘 밤 야근 확정. "네, 해보겠습니다." 해보겠다는 건 하겠다는 뜻이다. 6시, 저녁 팀원들 하나씩 퇴근한다. 후배가 물었다. "형 퇴근이요?" "야근." "아... 고생하세요." 7시. 사무실에 나랑 선배 한 분. 선배도 UI 수정 중. 편의점 가서 삼각김밥 샀다. 참치마요 2개. 커피 한 캔. 자판기 커피 한 잔 더. 자리 돌아와서 먹었다. 야근 시작 7시 반. 디테일 작업 시작. 3안 러프 위에 레이어 쌓기. 갑옷 디테일. 흠집, 스크래치. 사용감 표현. 벨트 디테일. 파우치 하나하나. 금속 버클. 가죽 질감. 무기 디테일. 검날 문양. 손잡이 장식. 칼날 반사광. 네온 라인. 빛 번짐 효과. 글로우 레이어. 색상 보정. 망토 주름. 바람에 날리는 느낌. 움직임 표현. 9시. 얼추 나왔다. 배경 간단히. 그라데이션. 바닥 그림자. 전체 색보정. 채도 올리고. 명암 대비. 10시. 완성. 저장. PNG, PSD 둘 다. 백업 폴더에 복사. 팀장님께 슬랙. "디테일 작업 완료했습니다." 답장 없다. 퇴근하셨겠지. 내일 아침에 보시겠지. 11시, 퇴근 짐 챙겼다. 타블렛 끄고. 모니터 끄고. 불 끄고. 사무실 나왔다. 선배도 퇴근하셨다. 건물 밖. 11월 밤바람. 춥다. 편의점 들렀다. 맥주 한 캔 샀다. 집 가서 마실 거다. 지하철. 사람 없다. 앉아서 폰 봤다. 트위터. 주말에 올린 팬아트. 좋아요 500개 넘었다. 댓글 몇 개 읽었다. "그림 너무 좋아요" "색감이 따뜻해요" "캐릭터 매력 있어요" 고맙다. 이래서 그림 그린다. 회사 일은 또 다르다. 내 그림이 아니다. 기획 의도를 그리는 거다. 클라이언트는 팀장님이고 PD님이다. 그래도 월급 받는다. 생활 할 수 있다. 장비 살 수 있다. 개인 작업은 취미다. 돈 안 되도 그린다. 집, 12시 집 도착. 샤워했다. 맥주 땄다. 침대 앉아서 마셨다. 하루 정리. 금요일 컨셉 3개. 주말 사이 기획 변경. 월요일 아침 피드백 3개. 6시간에 러프 3안. 야근해서 디테일 완성. 이게 일상이다. 내일 아침. 팀장님이 확인하신다. 괜찮다고 하실까. 수정 또 나올까. 수정 나와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일이다. 맥주 다 마셨다. 캔 버렸다. 침대 누웠다. 천장 봤다. 손목 아프다. 내일도 그려야 한다. 핸드폰 봤다. 트위터. 팔로워 몇 명 늘었다. 개인 작업 생각했다. 판타지 기사 시리즈. 이어 그리고 싶다. 주말에 그릴까. 아니다. 주말에도 피드백 올 거다. 눈 감았다. 내일 또 월요일 같겠지. 화요일인데.월요일은 언제나 수정으로 시작한다. 금요일의 나는 너무 순진했다.
- 09 Dec, 2025
아트스테이션에서 발견한 나보다 잘하는 29살
밤 11시, 아트스테이션 퇴근하고 집에 왔다. 샤워하고 타블렛 켰다. 습관처럼 아트스테이션을 연다. 메인에 뜨는 그림. 클릭했다. 프로필을 본다. 29세. 나랑 같다.스크롤을 내린다 캐릭터 컨셉 10장. 전부 다른 프로젝트다. 실루엣이 명확하다. 컬러 밸런스가 완벽하다. 디테일은 살아있는데 과하지 않다. 라이팅이 이렇게 들어가면 이런 느낌이구나. 천 주름을 저렇게 처리하면 되는구나. 금속 재질감이 저 정도면... 내 그림 폴더를 연다. 비교한다. 한숨이 나온다. 경력은 3년 프로필에 적혀있다. 3년차래. 나는 5년인데. 그는 중국 회사 다닌다. 포트폴리오에 실린 게임 2개. 전부 출시됐다. 내가 작업한 프로젝트는 3개. 출시된 건 1개. 나머지는 엎어졌다. 내 탓은 아니다. 기획이 바뀌고, 투자가 끊기고, 회사 사정이 있었다. 그래도 포폴은 비어있다.새벽 1시 여전히 그의 그림을 본다. PSD는 없으니 레이어 구조는 모른다. 하지만 작업 순서는 보인다. 큰 면부터 잡았다. 그림자 영역을 명확히 구분했다. 디테일은 마지막에 포인트로 넣었다. 나도 안다. 이론은. 실전에서는 디테일부터 붙잡는다. 전체를 못 보고 부분만 본다. 그러다 시간 없어서 러프로 제출한다. 팀장이 말한다. "완성도가..." 안다. 댓글을 읽는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전부 칭찬이다. "Amazing work!" "How long did this take?" "Do you have tutorial?" 튜토리얼이 있을 리 없다. 저 정도면 그냥 손에서 나온다. 나도 튜토리얼 본다. 유튜브에 수십 개. 북마크에 백 개 넘게 저장돼있다. 본 적은 있다. 따라한 적은 없다. 시간이 없어서. 아니다. 핑계다.새벽 2시, 그림을 그린다 타블렛을 연다. 새 캔버스. 오늘은 제대로 그려본다. 그의 방식대로. 큰 면부터. 실루엣 먼저. 30분 지났다. 뭔가 이상하다. 지운다. 다시 그린다. 1시간. 여전히 이상하다. 채도가 높은가. 명도가 문제인가. 구도를 바꿔볼까. 레퍼런스를 찾는다. 핀터레스트, 구글, 다시 아트스테이션. 레퍼런스만 2시간. 새벽 4시 그림은 반도 못 그렸다. 내일 출근이다. 10시까지. 5시간 자면 된다. 아니다. 씻고 준비하면 4시간. 그림을 저장한다. 파일명: "practice_0324_fail" 폴더에 비슷한 파일이 62개 있다. 전부 미완성이다. 출근길 지하철 졸리다. 어제 4시에 잤다. 핸드폰을 본다. 트위터. 타임라인에 또 누군가의 그림. 좋아요 5천. 잘 그렸다. 나보다. 언팔은 안 한다. 자극받으려고 팔로우한 거다. 자극받았다. 그래서 어젯밤 4시까지 깼다. 오늘 컨디션은 최악이다. 회사 도착 자리에 앉는다. 모니터를 켠다. 어제 작업하던 파일. NPC 컨셉 5종. 기획서를 다시 읽는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 하지만 개성 있게" 모순이다. 평범한데 개성 있게. 그래도 그린다. 이게 일이다. 점심시간. 동료가 말한다. "어제 아트스테이션 봤어? 걔 미쳤더라." 본 사람이 나만은 아니구나. 오후 3시, 리뷰 팀장 앞에 앉았다. NPC 컨셉 5종. 화면에 띄운다. 팀장이 스크롤을 내린다. 10초 정도. "음..." 이 음이 길면 별로라는 뜻이다. "괜찮은데, 좀 더 임팩트 있게 갈 수 있을까?" 있다. 시간만 주면. "네,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실루엣이 좀... 이 캐릭터랑 비슷해." 다르게 그렸는데. 팀장 눈엔 비슷한가보다. "다시 그려볼게요." 리비전 3차다. 같은 NPC에. 퇴근 후, 카페 집에 가기 싫다. 카페에 앉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노트북을 편다. 개인 작업. 커미션 2건 밀려있다. 마감은 이번 주. 하나를 연다. 캐릭터 전신 일러스트. 30분 그렸다. 손이 안 간다. 아트스테이션의 그 그림이 생각난다. 29살. 3년차. 나는 뭐하고 있나. 밤 10시, 집 샤워했다.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을 본다. 다시 아트스테이션. 그의 프로필. 팔로워 15만. 내 트위터는 8천. 적은 건 아니다. 근데 저 숫자를 보면. 인스타그램도 확인한다. 같은 사람. 포스팅 200개. 전부 퀄리티가 일정하다. 꾸준함이 다르구나. 나는 일주일에 하나 올리기도 힘들다. 회사 일 하고 나면 기력이 없다. 핑계다. 또. 새벽, 다시 타블렛 앞에 앉았다. 어제 그린 파일. "practice_0324_fail" 이어서 그린다. 한 시간. 조금 나아졌다. 두 시간. 확실히 전보다 낫다. 저장한다. 파일명: "practice_0325_progress" fail에서 progress로. 작은 발전이다. 하지만 그 29살과 비교하면. 여전히 멀다. 내일도 그릴 거다. 모레도. 언젠가는. 아니다. 언젠가는 없다. 내일 더 잘 그리면 된다. 오늘보다. 그것만.같은 나이인데 이렇게 다르다. 그래도 그린다. 비교는 자극이다. 포기는 아직.
- 08 Dec, 2025
트위터 팬아트 8000팔로워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토요일 오후 3시 또 올렸다. 이번 주 핫한 신작 게임 캐릭터 팬아트. 2시간 걸렸다. 러프 30분, 채색 1시간, 마무리 30분. 효율적으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업로드 버튼 누르는 순간 손이 떨렸다. 8247명이 보고 있다.처음엔 좋았다. 3년 전 팔로워 300명일 때만 해도 '와, 내 그림 좋아해 주는 사람이 300명이나 돼' 이랬다. 1000명 넘을 땐 신났다. 2000명 땐 '진짜 잘 그리나 봐' 착각했다. 5000명 넘어가면서부터 이상했다. 지금은 8000명. 숫자가 올라갈수록 그림 올리기가 무섭다. 댓글 창을 열면 "이번 건 별로네요" "전에 그린 거보다 못한 것 같은데" "손 비율이 이상해요" "이 캐릭터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요" 300명일 때는 "우와 멋져요!" "잘 봤습니다!" 이런 댓글뿐이었다. 8000명이 되니까 다르다. 100명 중 1명만 비판적이어도 80명이다. 숫자가 보인다. 매번.회사에서 하루 종일 수정 먹고 집 와서 또 수정 댓글 읽는 기분이 뭔지 아나. 지친다. 좋아요는 평균 800개 나온다. 리트윗 200개. 북마크 500개.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수치다. 근데 어제 그린 건 좋아요 650개였다. 150개 차이에 밤새 생각했다. '뭐가 문제였지? 구도? 채색? 타이밍?' 병이다. 알고 있다. 금요일 밤의 루틴 퇴근하고 9시. 샤워하고 치킨 시켜 먹고 10시. 타블렛 켠다. "오늘은 뭘 그릴까." 예전엔 그냥 그리고 싶은 거 그렸다. 좋아하는 캐릭터, 마음에 드는 구도, 시도해보고 싶은 채색. 지금은 다르다. "지금 뭐가 핫하지?" "어떤 게임이 트렌드지?" "어떤 캐릭터 그려야 반응 잘 나올까?" 트위터 타임라인 1시간 본다. 유튜브로 신작 게임 트레일러 본다. 픽시브 랭킹 확인한다. 전략적으로 그린다. 취미가 아니라 콘텐츠를.새벽 2시에 완성한다. 바로 올리지 않는다. "내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예약 업로드." 통계 봤다. 토요일 오후 3시~5시 사이가 반응 제일 좋다. 금요일 밤은 타임라인이 빠르게 흘러가서 묻힌다. 일요일 밤은 다들 우울해서 좋아요를 덜 누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한다. 8000명이 기다린다는 착각. 회사 동료가 물었다 "형 트위터 팔로워 많다며? 부업 의뢰 많이 들어오죠?" 많이 들어온다. 한 달에 캐릭터 커미션 5~6건. 건당 30만원에서 50만원. 많을 땐 월 200만원 번다. 회사 월급이 세후 350만원. 커미션까지 하면 550만원. "프리랜서 안 해요? 그 정도면 되지 않아요?" 된다. 계산해봤다. 여러 번. 캐릭터 일러스트 단가 50만원으로 잡고, 한 달에 10건만 해도 500만원이다. 지금 회사 월급보다 많다. 거기에 개인 굿즈 만들어서 팔면 더 벌 수 있다. 근데 안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년에도 8000명일까?" 팔로워는 변한다 2년 전 팔로워 5000명이었던 선배 있다. 지금 3000명이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봤다. "그림 스타일 바꿨더니 팔로워가 줄더라. 그리고 한 달 안 올렸더니 더 줄었어." 무섭다. 트위터 팔로워는 은행 잔고가 아니다. 적금이 아니다. 쌓이지 않는다. 관리해야 한다. 주 1회는 업로드해야 한다. 트렌드 따라가야 한다. 댓글 달아야 한다. 다른 작가 그림에 좋아요 눌러야 한다. 안 하면 줄어든다. 회사는 다르다. 출근만 하면 월급 나온다. 실적 안 좋아도 당장 잘리진 않는다. 연차 쌓인다. 4대 보험 있다. 프리랜서는? 일 안 들어오면 수입 0원이다. "8000명 팔로워 있으니까 걱정 없겠네요." 걱정뿐이다. 일요일 저녁의 불안 이번 주 팬아트 반응 좋았다. 좋아요 950개. 역대급이다. 기분 좋다. 5분간. 그다음 생각. "다음 주엔 뭘 그리지?" "이번보다 반응 안 좋으면 어떡하지?" "이 퀄리티 매주 유지할 수 있나?" 회사 일은 시키는 거 한다. 기획서 넘어오면 그린다. 수정 지시 오면 고친다. 마감 지키면 된다. 트위터는 다르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기획도 내가. 마감도 내가. 홍보도 내가. 자유로운 게 아니라 모든 책임이 내게 있다. 8000명이 기다린다는 압박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미친 거 맞다. 여자친구가 말했다 "요즘 주말에 맨날 그림만 그리네. 같이 놀자."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 주부터는 안 그린다고. 거짓말이다. 다음 주도 그린다. 안 그리면 불안하다. 팔로워 줄까 봐. 사람들이 날 잊을까 봐. "팔로워가 뭐라고 그래? 진짜 친구도 아니고." 맞는 말이다. 8000명 중에 내 이름 아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아프면 걱정해 줄 사람 있을까. 근데 숫자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나 잘 그리는 사람이야. 8000명이 증명해 줘.' 회사에서 상사한테 "이거 다시 그려" 들어도 버틸 수 있다. '트위터에선 인정받는데 뭐' 하면서. 병적인 거 안다. 근데 끊을 수가 없다. 회사 후배의 질문 "선배님은 회사 일이랑 개인 작업 어떻게 구분해요?" 구분 못 한다. 회사에서 배운 기술로 트위터 그림 그린다. 트위터 반응 보고 회사 컨셉에 적용한다. 경계가 없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모르겠다. 후배는 순수하다. "저는 회사 일은 회사 일이고, 제 그림은 제 그림이에요." 부럽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회사에서 게임 캐릭터 그리고, 집에서 내 취향대로 그렸다. 8000명 생기면서 바뀌었다. 집에서 그리는 그림도 '누가 볼 그림'이 됐다. 순수하게 나만 보려고 그린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새벽 3시의 솔직함 술 한 잔 했다. 혼자. 트위터 들어갔다. 팔로워 목록 봤다. 8247명. 이 중에 진짜 내 그림 좋아하는 사람 몇 명이나 될까. 대부분은 팔로우 수백 명 하는 사람들이다. 타임라인에 스쳐 지나가는 그림 중 하나일 뿐.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인정받을수록 불안해진다. 역설이다. 팔로워 300명일 때가 제일 행복했다. '내 그림 좋아해 주는 사람이 300명이나 있어' 순수하게 기뻤다. 8000명 됐는데 행복하지 않다. '8000명을 유지해야 해. 더 늘려야 해. 떨어지면 안 돼.' 숫자가 목표가 됐다. 프리랜서 하면 더 불안할 것 같다. 회사는 최소한 고정 수입이 있다. 프리랜서는 매달 8000명을 증명해야 한다. '나 일 잘해요'를. 못 하겠다. 그래도 그린다 월요일 아침. 출근한다. 점심시간에 트위터 확인한다. 토요일에 올린 그림 좋아요 1024개 됐다. 1000 넘었다. 기분 좋다. 퇴근하고 집 온다. 타블렛 켠다. "이번 주엔 뭘 그리지." 또 그린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묻는다면. 둘 다다. 8000명이 있어서 그림 그릴 이유가 생긴다. 8000명이 있어서 그림 그리기 힘들어진다. 없으면 외롭고, 있으면 불안하다. 근데 솔직히. 내일도 그릴 거다. 8000명이 보든 말든. 아니, 본다는 게 중요한 거다. 누가 보니까 끝까지 그린다. 누가 보니까 퀴리티 올린다. 누가 보니까 포기 안 한다. 혼자였으면 진작 관뒀을 거다. 그러니까 축복이다. 불편한. 답은 없다 프리랜서 할 거냐고? 모르겠다. 다음 달에도 똑같은 고민할 거다. 내년에도. 8000명이 1만 명 되면 결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때도 똑같을 거다. '1만 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겠지. 숫자는 답이 아니다. 근데 숫자를 본다. 매일.팔로워 8000명은 자랑도 아니고 실력도 아니다. 그냥 불안의 크기다.
- 07 Dec, 2025
퇴근 후 개인 작업이 진짜 일인 날들
7시 10분, 진짜 출근 회사 문 나섰다. 7시 12분. 집까지 25분. 편의점 들르면 30분.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이 진짜 출근이다. 회사에서 8시간 그렸다. 아니, 그린 건 4시간? 나머지는 회의, 수정 회의, 재수정 회의. "실루엣 좀 더 강하게요." "배색 다시요." "기획 바뀌었어요." OK 누르고 레이어 복사하고 또 그렸다. 근데 이건 내 그림이 아니다. 회사 그림이다. 클라이언트 그림이다. 손은 움직였는데 머리는 안 움직였다.집에 오면 30분 멍 때린다. 소파에 누워서 천장 본다. 유튜브 틀어놓는다. 그림 타임랩스 영상. 남의 작업 보면서 손목 푼다. 8시쯤 되면 자리에 앉는다. 타블렛 켜고 클립 스튜디오 띄운다. 새 캔버스. 4000x4000. 300dpi. 이제부터가 진짜 일이다. 회사 그림 vs 내 그림 회사에서 그리는 건 '작업'이다. 집에서 그리는 건 '그림'이다. 같은 손으로 그리는데 다르다. 회사 작업은 체크리스트다.기획 의도 반영했나 아트 디렉터 피드백 적용했나 다른 팀원 스타일이랑 맞나 일정 안에 들어오나10개 체크하면 끝이다. 통과하면 끝이다. 근데 내 그림이 거기 없다.개인 작업은 체크리스트가 없다. 그냥 '이거 그리고 싶다'로 시작한다. 팬아트든 오리지널이든 커미션이든. 손이 기억하는 선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눈매, 내가 편한 터치. 회사에서 못 쓰는 브러시 쓴다. 3시간 걸려도 상관없다. 이건 내 시간이니까. 근데 마감 전에는 못 그린다. 마감 2주 전의 죄책감 회사 마감이 다가오면 개인 작업이 멈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야근하면 10시 11시. 집 와서 씻고 누우면 12시. 근데 그것보다 정신적으로 못 그린다. 회사 일이 머리에 차있다. "내일 수정 들어올 거야." "이 컨셉 괜찮을까." 손목은 풀렸는데 머리가 안 풀렸다. 트위터 켰다. 팔로워들 그림 올라온다. "오늘 낙서~" 하면서 완성도 높은 일러 올린다. 좋아요 눌렀다. 부럽다.마지막 개인 그림이 2주 전이다. 트위터에 "바쁘네요 ㅠㅠ" 올렸다. 팔로워들 응원해준다. "화이팅!" "기다려요!" 고맙다. 근데 죄책감이다. 커미션 밀렸다. 3개. 다 선금 받았다. 한 달 전에.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DM 보냈다. 3번째 사과다. 개인 작업 안 하니까 내가 녹슨다. 회사 일만 하면 손이 거기 맞춰진다. 정해진 스타일, 정해진 구도, 정해진 색감. 2년 후에 이직하면 포폴이 없다. 왜 못 버리나 그만두면 되지 않냐고? 개인 작업만 하면 되지 않냐고? 계산해봤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평균 건당 50만원. 한 달에 10건 받으면 500만원. 세전. 매달 안정적으로 10건? 불가능하다. 회사는 월급이 나온다. 5000만원 나눠서. 4대보험 된다. 퇴직금 쌓인다. 마감 끝나면 보너스 나온다. 그리고 솔직히 회사 일도 배우는 게 있다. 게임 캐릭터 워크플로우, 팀 작업 프로세스. 혼자서는 못 배운다. 근데 개인 작업 안 하면 내가 죽는다. 창작자로서 죽는다. 회사 일만 5년 하면 그냥 '작업자'가 된다. 트위터 팔로워 8000명. 내 그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커미션 들어온다. 여기서 기회가 온다. 이걸 놓으면 나중에 다시 못 만든다. 그래서 못 버린다. 회사도, 개인 작업도. 11시의 선택 마감 끝났다. 어제. 오늘은 정시 퇴근이다. 7시 10분. 집 와서 밥 먹고 8시. 3시간 있다. 자야 하는 시간까지. 씻고 내일 준비하면 2시간 반. 그림 그릴 수 있다. 타블렛 켰다. 밀린 커미션 파일 열었다. 러프 50% 완성되어 있다. 3주 전 나의 흔적. "미안 조금만 더 기다려..." DM 확인했다. 브러시 잡았다. 손목 풀렸다. 레이어 추가하고 선 따기 시작했다. 1시간 지났다. 70% 됐다. 눈 비볐다. 11시 30분. 내일 10시 출근이다. 8시간 자려면 지금 자야 한다. 근데 80%까지만 더 하면 내일 완성이다. 내일 회사에서? 불가능하다. 내일 저녁에? 회의 3개 잡혔다. 지금 아니면 또 1주일이다. 30분 더 그렸다. 12시 됐다. 저장하고 껐다. 85% 완성. 손목 아프다. 어깨 뻐근하다. 침대 누웠다. 천장 봤다. 죄책감 15% 줄었다. 내일 또 회사 간다. 결국 이게 내 일상이다. 회사에서 8시간, 집에서 3시간. 회사 일은 생계, 개인 작업은 정체성. 둘 다 필요하다. 둘 다 버릴 수 없다. 언젠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프리랜서 갈까, 회사 계속 다닐까. 근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둘 다 한다. 퇴근 후 3시간이 내 진짜 일이다. 손목 테이핑 다시 해야겠다. 내일 약국 가자.12시 20분. 내일 또 10시 출근이다. 근데 오늘 85% 채웠다.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