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개인 작업이 진짜 일인 날들

퇴근 후 개인 작업이 진짜 일인 날들

7시 10분, 진짜 출근

회사 문 나섰다. 7시 12분. 집까지 25분. 편의점 들르면 30분.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이 진짜 출근이다.

회사에서 8시간 그렸다. 아니, 그린 건 4시간? 나머지는 회의, 수정 회의, 재수정 회의. “실루엣 좀 더 강하게요.” “배색 다시요.” “기획 바뀌었어요.” OK 누르고 레이어 복사하고 또 그렸다.

근데 이건 내 그림이 아니다. 회사 그림이다. 클라이언트 그림이다. 손은 움직였는데 머리는 안 움직였다.

집에 오면 30분 멍 때린다. 소파에 누워서 천장 본다. 유튜브 틀어놓는다. 그림 타임랩스 영상. 남의 작업 보면서 손목 푼다.

8시쯤 되면 자리에 앉는다. 타블렛 켜고 클립 스튜디오 띄운다. 새 캔버스. 4000x4000. 300dpi. 이제부터가 진짜 일이다.

회사 그림 vs 내 그림

회사에서 그리는 건 ‘작업’이다. 집에서 그리는 건 ‘그림’이다. 같은 손으로 그리는데 다르다.

회사 작업은 체크리스트다.

  • 기획 의도 반영했나
  • 아트 디렉터 피드백 적용했나
  • 다른 팀원 스타일이랑 맞나
  • 일정 안에 들어오나

10개 체크하면 끝이다. 통과하면 끝이다. 근데 내 그림이 거기 없다.

개인 작업은 체크리스트가 없다. 그냥 ‘이거 그리고 싶다’로 시작한다. 팬아트든 오리지널이든 커미션이든.

손이 기억하는 선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눈매, 내가 편한 터치. 회사에서 못 쓰는 브러시 쓴다. 3시간 걸려도 상관없다. 이건 내 시간이니까.

근데 마감 전에는 못 그린다.

마감 2주 전의 죄책감

회사 마감이 다가오면 개인 작업이 멈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야근하면 10시 11시. 집 와서 씻고 누우면 12시.

근데 그것보다 정신적으로 못 그린다. 회사 일이 머리에 차있다. “내일 수정 들어올 거야.” “이 컨셉 괜찮을까.” 손목은 풀렸는데 머리가 안 풀렸다.

트위터 켰다. 팔로워들 그림 올라온다. “오늘 낙서~” 하면서 완성도 높은 일러 올린다. 좋아요 눌렀다. 부럽다.

마지막 개인 그림이 2주 전이다. 트위터에 “바쁘네요 ㅠㅠ” 올렸다. 팔로워들 응원해준다. “화이팅!” “기다려요!” 고맙다. 근데 죄책감이다.

커미션 밀렸다. 3개. 다 선금 받았다. 한 달 전에.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DM 보냈다. 3번째 사과다.

개인 작업 안 하니까 내가 녹슨다. 회사 일만 하면 손이 거기 맞춰진다. 정해진 스타일, 정해진 구도, 정해진 색감. 2년 후에 이직하면 포폴이 없다.

왜 못 버리나

그만두면 되지 않냐고? 개인 작업만 하면 되지 않냐고?

계산해봤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평균 건당 50만원. 한 달에 10건 받으면 500만원. 세전. 매달 안정적으로 10건? 불가능하다.

회사는 월급이 나온다. 5000만원 나눠서. 4대보험 된다. 퇴직금 쌓인다. 마감 끝나면 보너스 나온다.

그리고 솔직히 회사 일도 배우는 게 있다. 게임 캐릭터 워크플로우, 팀 작업 프로세스. 혼자서는 못 배운다.

근데 개인 작업 안 하면 내가 죽는다. 창작자로서 죽는다. 회사 일만 5년 하면 그냥 ‘작업자’가 된다.

트위터 팔로워 8000명. 내 그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커미션 들어온다. 여기서 기회가 온다. 이걸 놓으면 나중에 다시 못 만든다.

그래서 못 버린다. 회사도, 개인 작업도.

11시의 선택

마감 끝났다. 어제. 오늘은 정시 퇴근이다. 7시 10분. 집 와서 밥 먹고 8시.

3시간 있다. 자야 하는 시간까지. 씻고 내일 준비하면 2시간 반. 그림 그릴 수 있다.

타블렛 켰다. 밀린 커미션 파일 열었다. 러프 50% 완성되어 있다. 3주 전 나의 흔적. “미안 조금만 더 기다려…” DM 확인했다.

브러시 잡았다. 손목 풀렸다. 레이어 추가하고 선 따기 시작했다. 1시간 지났다. 70% 됐다.

눈 비볐다. 11시 30분. 내일 10시 출근이다. 8시간 자려면 지금 자야 한다. 근데 80%까지만 더 하면 내일 완성이다.

내일 회사에서? 불가능하다. 내일 저녁에? 회의 3개 잡혔다.

지금 아니면 또 1주일이다.

30분 더 그렸다. 12시 됐다. 저장하고 껐다. 85% 완성. 손목 아프다. 어깨 뻐근하다.

침대 누웠다. 천장 봤다. 죄책감 15% 줄었다. 내일 또 회사 간다.

결국

이게 내 일상이다. 회사에서 8시간, 집에서 3시간. 회사 일은 생계, 개인 작업은 정체성.

둘 다 필요하다. 둘 다 버릴 수 없다. 언젠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프리랜서 갈까, 회사 계속 다닐까.

근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둘 다 한다. 퇴근 후 3시간이 내 진짜 일이다.

손목 테이핑 다시 해야겠다. 내일 약국 가자.


12시 20분. 내일 또 10시 출근이다. 근데 오늘 85% 채웠다.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