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 더 주세요: 게임 원화가의 아침은 레퍼 수집으로 시작된다

레퍼 더 주세요: 게임 원화가의 아침은 레퍼 수집으로 시작된다

레퍼 더 주세요: 게임 원화가의 아침은 레퍼 수집으로 시작된다

출근했다. 9시 50분이다. 10시까진 10분 남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자리 앞에 앉은 지 2분 만에 나는 이미 폴더를 열고 있었다. 기획서 아니다. 레퍼런스다. 어제 밤 11시에 정리하던 폴더. 아침에 또 확인한다.

‘이거면 되겠지?’

아니다. 절대 안 된다. 이 폴더는 너무 따뜻하다. 오늘 그릴 캐릭터는 냉정해야 한다. 검색 창에 입력했다.

“mage character design dark fantasy concept art”

또 검색했다.

“female warrior armor reference asian”

또.

“blue hair anime girl portrait lighting study”

이 과정이 시작되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 없다. 좋은 레퍼가 없으면 이 손가락들은 태블렛 펜을 들 이유를 잃는다.

레퍼가 답이다

게임 원화가의 일은 사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레퍼 : 스케치 = 1 : 1

레퍼가 좋으면 스케치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 레퍼가 형편하면 뭘 그려도 불안하다. 선이 떨린다. 마음이 떨린다.

“왜 안 되지?”

이건 실력 부족 때문 아니다. 레퍼 부족 때문이다.

어제 팀장이 넘겨줬던 기획서를 봤다. ‘동양 판타지 여전사’ 정도의 설명이 전부다. 여전사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아한 여전사일 수도 있고, 거친 여전사일 수도 있고, 섹시한 여전사일 수도 있다. (여기서 멈춘다. 그 얘기는 따로 한다.)

그래서 레퍼다. 내가 찾는 건 이미지 하나가 아니라 톤(tone)이다.

아트스테이션에서 한 아티스트의 포트폴리오를 한참 봤다. 드로우 스타일, 컬러 감각, 실루엣. 이 세트가 맞으면 체크한다. 클립 스튜디오에 갖다 붙인다. 요즘은 아이패드에서 사진도 찍어서 넣는다. 손 각도. 옷 주름. 금속 반사.

“아, 이것만 봐도 터치감이 다르네.”

입버릇이 됐다.

월요일은 레퍼 전쟁이다

월요일 아침은 특히 심하다.

주말에 새로 올라온 레퍼들 때문이다. 아트스테이션은 주말도 잠들지 않는다. 픽시브도. 심지어 디스코드 서버들도. 게임 원화가 커뮤니티는 24시간 작동 중이다.

근데 다 찾아야 한다. 왜냐면 주말에 올라온 건 다음 주 내 누군가의 영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쟁상태가 된다. 아트 감각은 누가 더 빨리 좋은 이미지를 발견하느냐와도 연관이 있다.

“어? 이거 우리 팀에만 아는 톤인데?”

이 느낌이 중요하다.

월요일 9시 57분. 나는 여전히 레퍼를 본다. 옆자리 준호도 한다. 그 옆 수경이도. 모두가 같은 것을 하고 있다. 입을 다물고 모니터만 본다.

“레퍼 머리 각도 좋네.” “근데 옷은 우리 톤 아니다.” “손 자세 참고할만 하네.”

이게 월요일 아침 대화다.

10시 정각. 팀장이 들어온다. 우리는 재빨리 하던 폴더를 닫는다. 아직 할 것 다 못 했지만.

레퍼는 영원히 부족하다. 이 경험을 5년 해봤는데, 한 번도 “아, 이제 레퍼 충분하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레퍼 없이는 살 수 없는 몸

커미션을 받을 때도 첫 번째 질문은 같다.

“레퍼 따로 주실 수 있을까요?”

선을 긋기 전에 레퍼를 본다. 머리 비율을 확인하고, 눈 거리를 확인하고, 손가락 길이를 확인한다. 이건 관습 같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작업 방식이다.

회사에서 5년. 프리랜서로 1년. 합쳐서 6년을 이렇게 살았다.

좋은 레퍼를 찾는 그 경험은 배우는 것 같기도 하고, 도둑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창작자의 의무인 것 같기도 하다. 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어제 여자친구가 물었다.

“너 그림 그릴 때 왜 자료 사진을 그렇게 오래 봐?”

“눈이 손을 이끌어야 하니까.”

그렇게 대답했다. 이게 가장 정직한 답이다.

손만 움직이는 건 절대 된다. 눈이 먼저 무언가를 봐야 한다. 손가락이 따라온다. 레퍼가 눈에 들어와야 손이 그린다. 이게 그림 그리는 순서다.

AI 그림이 무섭긴 한데, 결국 이 부분 때문이다. 레퍼를 수집하고, 정렬하고, 조합하는 능력. 하지만 손으로 정말로 그려낼 수 있는가는 다르다. 여기가 우리와 그것의 차이점이다. (아직은 그렇다고 믿고 싶다.)

[IMAGE_4]

레퍼 폴더는 자산이다

폴더 구조를 잠깐 공개하자면:

  • 기본: 얼굴 각도, 손 자세, 발 비율, 옷 주름
  • 캐릭터 타입별: 전사, 마법사, 도둑, 성직자, 몬스터, 동물, 로봇
  • 컬러 레퍼: 차가운 톤, 따뜻한 톤, 금속, 천, 가죽, 마법 이펙트
  • 감정별: 중립, 화남, 슬픔, 기쁨, 충격
  • 문화별: 동양, 서양, 판타지, 현대, 사이버펑크
  • 피나레스: 한 달에 한 번 스크린샷 모아둔 최고의 레퍼들

마지막 폴더가 제일 중요하다. 이건 팔 수도 있다. 다른 회사 신입 원화가가 물어본 적 있다.

“선배, 피나레스 폴더 사줄 수 있어요?”

못 줬다. 이건 내 자산이니까.

5년간 구글 이미지, 아트스테이션, 픽시브, 언스플래시, 인스타그램, 더 씽크탱크, 심지어 영화 스크린샷까지 수집한 결과물이다. 한 번 정렬하면 다시 정렬할 일은 없다. 계속 추가만 된다.

요즘 고민이 생겼다. 클라우드에 백업을 해야 할까? 이게 터지면 몇 주 작업이 날아간다. 그런데 클라우드에 올리면 느려진다. 외장 하드에 넣기도 했는데, 3개 차있어도 항상 부족하다.

누군가는 AI로 레퍼를 생성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AI 레퍼는 모두가 같은 톤이다. 우리가 찾는 건 다양성이고, 각 아티스트의 개성다. 그래서 수집은 계속된다.

지금도 한다. 밤 11시. 집에서 퇴근하고 와이파이 켠 후. 태블렛을 켠다. 아르트스테이션 핫 피크를 본다. 좋은 거 있나? 있으면 받아둔다.

또 저장했다. 폴더 하나가 12기가 가까워진다.

[IMAGE_5]

언제까지 이럴까

팀장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레퍼 보다가 시간 날리지 말고, 작업만 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말이다.

레퍼 없이 작업하면 손이 멈춘다. 손이 멈추면 시간이 더 많이 간다. 결국 같다. 아니, 레퍼를 잘 찾는 게 더 빠르다.

마감 1주일 전부턴 이 과정이 생략된다. 그냥 그린다. 레퍼를 찾을 시간이 없으니까. 하지만 질은 떨어진다. 버그가 늘어난다. 손가락이 어색하다. 눈 비율이 이상하다.

“리비전 몇 차에요?”

기획팀이 묻는다.

“5차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라는 눈빛.

그건 레퍼 부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럼 핑계로 들린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내일 아침도 내가 할 일은 같다. 9시 50분 자리에 앉아서 폴더를 열 거다. 레퍼를 본다. 또 본다. 또 본다.

손이 움직일 때까지.


레퍼가 답이다. 근데 언제까지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