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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니

출근하니 슬랙에 '긴급' 태그 3개, 그날의 하루는 끝났다

출근하니 슬랙에 '긴급' 태그 3개, 그날의 하루는 끝났다

출근하니 슬랙에 '긴급' 태그 3개, 그날의 하루는 끝났다 9시 52분, 회사 앞 카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폰을 켰다. 슬랙 알림 47개. 스크롤을 내렸다. 빨간 느낌표가 세 개. @channel 태그가 두 개. 기획팀장 DM이 다섯 개. "오늘 회의 자료 준비하려 했는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었다. 회사 들어가기 전에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첫 번째 긴급: "신규 캐릭터 얼굴 표정 이상함. 오늘 중 수정 가능?" 두 번째 긴급: "클베 빌드에 UI 아이콘 깨짐. 원본 파일 어디?" 세 번째 긴급: "마케팅팀에서 이벤트 배너 오늘까지래요. 2종." 오늘 할 일 리스트를 떠올렸다.신규 보스 몬스터 컨셉 러프 3종 팀 내부 리뷰 준비 기획서 읽고 레퍼런스 정리전부 날아갔다.10시 05분, 자리 컴퓨터를 켰다. 부팅하는 동안 슬랙을 다시 확인했다. 알림이 12개 더 늘었다. 기획팀장이 온라인 상태로 바뀌었다. 3초 후 DM이 왔다. "디자님 출근하셨어요? 긴급 건들 확인 부탁드려요~" 물결 표시가 두 개. 급한 거 맞다. "네, 지금 확인 중입니다." Enter를 누르는 순간, 할 일의 우선순위가 재편성됐다.표정 수정 (1순위 → 보류) UI 아이콘 원본 찾기 (없었음 → 긴급) 마케팅 배너 (몰랐음 → 최우선) 보스 몬스터 컨셉 (오늘 → 내일) 팀 리뷰 준비 (이번 주 → 다음 주)포토샵을 켰다. 최근 파일 목록을 봤다. 어제 작업하던 보스 러프가 보였다. "미안, 넌 오늘 못 만나."10시 20분, 첫 번째 긴급 표정 수정부터 했다. PSD를 열었다. 레이어가 127개. 표정 레이어를 찾았다. 28번째. 기획팀이 올린 피드백을 읽었다. "표정이 너무 무표정해요. 좀 더 생동감 있게?" "근데 너무 밝으면 캐릭터 콘셉이랑 안 맞고요." "적당히 미소 띠는 느낌?" 적당히. 이 단어가 제일 어렵다. 기획자마다 '적당히'의 기준이 다르다. 일단 눈썹을 올렸다. 2픽셀. 입꼬리를 올렸다. 3픽셀. 눈동자에 하이라이트를 추가했다. 저장하고 슬랙에 올렸다. "이 정도 어떠신가요?" 3분 후 답장. "오 좋은데요! 근데 좀 더 밝게 할 수 있을까요?" 다시 PSD를 열었다. 입꼬리를 2픽셀 더 올렸다. 저장, 업로드. "이 정도는?" "완벽해요!" 20분 걸렸다. 표정 레이어 두 개 수정하는 데.11시, 두 번째 긴급 UI 아이콘 원본 파일. 문제는 내가 안 만들었다는 것. 전임자가 만든 파일이다. 퇴사한 지 6개월. 인수인계는 엑셀 한 장. "UI 아이콘은 /Assets/UI/Icon 폴더에" 폴더를 열었다. 파일이 643개. 이름은 전부 "icon_001.png", "icon_002.png" 원본 PSD는 없다. 백업 폴더를 뒤졌다. NAS를 뒤졌다. 구글 드라이브를 검색했다. 30분 후, 찾았다. 전임자 개인 폴더 깊숙한 곳에. "Icon_final_real_final_v3.psd" 네이밍 센스는 여전하다. 파일을 열었다. 레이어 정리가 안 돼 있다. "레이어 1 복사본 4", "레이어 12 복사본" 깨진 아이콘을 찾아서 익스포트했다. 슬랙에 올렸다. "찾았습니다." 좋아요 이모지 세 개. 감사 메시지는 없다. 11시 40분. 오전이 거의 끝났다. 12시, 세 번째 긴급 점심 먹고 하려 했다. 배가 고팠다. 아침을 안 먹었다. 슬랙에서 마케팅팀 DM. "디자님 배너 작업 언제쯤 가능하세요? 오후 3시까지 필요해요ㅠㅠ" 시계를 봤다. 12시 5분. 점심 시간 빼면 2시간.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 책상에서 먹었다. 마케팅팀이 준 기획서를 읽었다. "컨셉: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느낌" "타겟: 20-30대 남성, 여성" "톤앤매너: 밝으면서도 고급스럽게" 화려한데 절제된. 밝은데 고급스러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안다. '잘 만들어주세요'라는 뜻이다. 레퍼런스를 찾았다. 핀터레스트에서 'game event banner'를 검색했다. 500장을 봤다. 5장을 저장했다. 포토샵 새 파일. 1920x400. 캐릭터 일러스트를 배치했다. 배경을 깔았다. 그라데이션. 텍스트를 넣었다. 폰트를 고민했다. 1차 시안 완성. 1시 30분. 슬랙에 올렸다. 5분 후 피드백. "좋아요! 근데 캐릭터 좀 더 크게, 배경은 좀 더 어둡게?" 수정했다. 캐릭터 120% 확대. 배경 명도 -15. 다시 올렸다. "오 좋은데, 텍스트가 안 보이네요?" 맞다. 배경을 어둡게 해서 텍스트가 묻혔다. 텍스트에 외곽선을 넣었다. 세 번째 업로드. "완벽해요! 2종도 부탁드려요~" 2종. 같은 작업을 한 번 더. 2시 50분에 끝났다. 3시, 계획된 작업 드디어 보스 몬스터 컨셉을 시작하려 했다. 태블릿을 켰다. 브러시를 선택했다. 슬랙 알림. 기획팀 채널. "@channel 내일 클라이언트 빌드 올라갑니다. 미완성 에셋은 오늘까지 완료 부탁드려요." 내일 빌드. 오늘까지 완료. 할 일 리스트를 다시 봤다. 미완성 에셋이 7개. 보스 몬스터는 다음 주 빌드용이다. 우선순위가 또 바뀌었다. 미완성 에셋부터 마무리해야 한다. NPC 얼굴 3종, 무기 아이콘 2종, 배경 소품 2종. 러프 상태였다. 디테일 작업이 필요하다. 시계를 봤다. 3시 15분. 퇴근까지 4시간. "오늘도 야근이구나." 5시, 집중 작업 이어폰을 꼈다. 로파이 플레이리스트. 슬랙 알림을 껐다. 30분만. NPC 얼굴부터 했다. 러프를 정리했다. 선을 다듬었다. 색을 올렸다. 음영을 넣었다. 집중하면 빠르다. 20분 만에 1개 완성. 두 번째 NPC. 15분. 세 번째 NPC. 18분. 무기 아이콘. 10분, 12분. 배경 소품. 8분, 9분. 5시 50분. 전부 끝났다. 슬랙 알림을 다시 켰다. 밀린 메시지 23개. 대부분 확인만 하면 되는 것들. "수고하셨습니다", "확인했어요", "오 좋네요"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획팀장 DM. "디자님, 보스 몬스터 컨셉 진행 상황 어떠세요?" 진행 상황. 0%. "오늘 긴급 건들 처리하느라 시작을 못 했습니다. 내일 오전부터 집중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답장이 바로 왔다. "아 그렇군요.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 기대할게요!" 기대. 부담이 된다. 7시, 퇴근 자리를 정리했다. 태블릿을 끄고, 모니터를 껐다. 오늘 한 일을 생각해봤다.표정 수정: 20분 아이콘 파일 찾기: 40분 마케팅 배너 2종: 2시간 미완성 에셋 7종: 2시간합계: 5시간. 계획했던 일: 0%.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옆자리 선배가 물었다. "오늘 보스 컨셉 시작했어?" "못 했어요. 긴급 건들만 하다가..." "어제도 그랬잖아." 맞다. 어제도 긴급 건 3개였다. "내일은 해야지." "내일도 긴급 건 올 걸?" 선배가 웃었다. 농담이 아니다. 9시, 집 현관문을 열었다. 불을 켰다. 가방을 던졌다. 소파에 앉아서 폰을 켰다. 슬랙을 확인하지 않으려 했다. 확인했다. 새 메시지 5개. 전부 내일 오전 회의 공지. 타임라인을 봤다. 다른 회사 아티스트들이 올린 작업물. 개인 작업, 커미션, 팬아트. "다들 언제 그리는 거지." 내 폴더를 열었다. 개인 작업 PSD. 마지막 수정일: 2주 전. 열어보지 않았다. 열면 그리고 싶어진다. 그리고 싶어지면 못 자게 된다. 내일 또 긴급 건이 올 것이다. 샤워를 하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 보스 몬스터가 떠올랐다. 러프 스케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폰을 들었다. 메모 앱을 켰다. 아이디어를 적었다. "뿔 3개, 날개 비대칭, 색감은 보라+검정" 내일 출근하면 이걸 보고 시작할 것이다. 긴급 건이 없다면.오늘도 긴급이 일상을 이겼다. 내일은 내 작업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