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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면
- 25 Dec, 2025
픽시브와 아트스테이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은 이유
아침 8시 루틴 눈 뜨면 핸드폰. 픽시브 알림부터 확인한다. 밤새 올라온 일본 작가들 그림. 한국 작가들 팬아트. 아트스테이션 Popular 섹션. 이게 5년째 루틴이다. 출근 준비하면서도 스크롤. 지하철에서도 스크롤. 회사 도착해서 컴퓨터 켜면 또 확인. 이상하게 안 보면 불안하다. 뭔가 놓칠 것 같아서. "오늘도 괴물들이 그림 올렸네." 혼잣말이 나온다.그때는 몰랐다 2019년. 신입 때. 선배가 알려줬다. "픽시브 매일 봐. 일본 작가들 퀄리티 장난 아니야." 그때만 해도 신기했다.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아트스테이션도 그때 처음. 해외 AAA급 아티스트들 작업물. 입이 안 다물어졌다. "나도 저렇게 그리고 싶다." 순수했다. 정말로. 매일 봤다. 레퍼런스 수집 명목으로. 좋아요 누르고 팔로우하고. PSD 파일 분석하고. 실력이 늘었다. 확실히. 눈이 높아지니까 손도 따라왔다. 1년 만에 팀장한테 칭찬받았다. "많이 늘었네?" 픽시브 덕분이었다. 아트스테이션 덕분이었다. 고마웠다.3년차부터 이상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보는 게 괴로웠다. 일본 작가 A. 나랑 동갑. 팔로워 50만. 화집 3권 냈다. 한국 작가 B. 나보다 어림. 넷플릭스 애니 메인 원화. 중국 작가 C. 미호요 소속. 내가 좋아하는 게임 만든다. "나는 뭐하고 있지?" 매일 보는데 자꾸 비교됐다. 픽시브 랭킹 들어간 적 없다. 아트스테이션 Popular 한 번도 못 올라갔다. 회사 일은 잘한다고 한다. 팀에서 에이스래. 근데 그게 뭔 의미야. 저 사람들은 전 세계가 보는데. 출근길 지하철. 픽시브 보다가 한숨 나온다. "왜 보는 거야. 또 우울해지는데." 손은 스크롤하고 있다.악순환의 시작 픽시브 보면 → 좌절 → 그래도 봐야지 → 또 좌절. 이게 매일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그려?" "나는 왜 발전이 없지?" "5년 됐는데 이 정도면 재능 없는 거 아냐?" 회사에서 그린 캐릭터. 괜찮게 나왔다. 팀장이 좋다고 했다. 근데 퇴근하고 픽시브 보니까. 비슷한 컨셉 그림이 있다. 10배는 잘 그렸다. "아 씨." 기분이 바닥친다. 여자친구가 물어본다. "왜 그래?" "아니야. 그냥 피곤해." 말 못 한다. 이상하게 들릴까 봐. '다른 사람 그림 보고 우울해요' 이게 뭔 소린가. 근데 진짜 우울하다. 그래도 못 끊는다 일주일만 안 보자. 작심했다. 3일 버텼다. 회사에서 캐릭터 디자인 의뢰 들어왔다. "판타지풍 여전사. 레퍼런스 찾아봐." 핑계가 생겼다. 픽시브 켰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자기합리화다. 2시간 동안 레퍼런스 수집. 아니 사실 구경. 좋아요 100개 누른 거 같다. 북마크 30개. 정작 우리 프로젝트랑 맞는 건 5개. 시간 낭비인 거 안다. 근데 못 끊는다. 마약 같다. 진짜로. "이번엔 다르겠지. 영감 받겠지." 매번 똑같은 기대. 매번 똑같은 실망. 가끔 도움이 되긴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실력은 늘었다. 5년 전 나랑 지금 나. 비교 안 된다. 픽시브에서 본 브러시 터치. 따라해봤다. 내 그림에 적용됐다. 아트스테이션에서 본 라이팅 기법. 연습했다. 회사 작업에 썼다. 팀장이 놀랐다. 일본 작가 트위터에서 본 작업 과정. GIF로 올라온 거. 분석했다. 내 워크플로우가 바뀌었다. "역시 고수들은 다르네." 배운다. 분명히. 그림 그릴 때 머릿속에 레퍼런스 수백 개가 있다. 다 거기서 본 거다.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확실하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 게 문제다. 비교의 늪 실력은 늘었는데 자존감은 바닥이다. 이상한 일이지. 픽시브 랭킹. 1위부터 100위까지 다 본다. "나는 언제 저기 들어가나." 아트스테이션 Trending. 24시간 동안 올라온 그림들. "저 사람 작년에 신인이었는데. 벌써 저렇게 됐네." 숫자가 보인다. 좋아요 수. 팔로워 수. 조회수. 내 트위터. 팔로워 8000명. 적은 건 아니다. 근데 저 사람들은 10만. 50만. 100만. "차이가 뭐야." 그림 실력? 운? 마케팅? SNS 빨? 모르겠다. 근데 자꾸 비교된다. 회사 동기가 말했다.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자신감 가져." 고맙다. 진심으로. 근데 픽시브 보면 그 자신감이 사라진다. "잘 그린다는 게 뭐야. 세상은 넓고 괴물은 많은데." AI 시대의 추가 타격 요즘 더 복잡해졌다. 픽시브에 AI 그림이 넘친다. NovelAI. Stable Diffusion. Midjourney. "10분 만에 이걸 뽑았대." 나는 10시간 걸린다. 아트스테이션도 마찬가지. AI 태그 논란 있었다. "우리 끝난 거 아냐?" 동기들이랑 술 마시면서 한 얘기. 다들 불안해한다. 그래도 픽시브는 본다. 아트스테이션도 본다. 이제는 AI 그림까지 레퍼런스 삼는다. "이 구도 괜찮네. 이 색감 참고해야지." 아이러니다. 내 일자리 위협하는 AI한테 배운다. 웃긴 건. 그래도 안 본 수가 없다. "안 보면 도태될 거 같아." 강박이다. 새벽 2시의 나 개인 작업 중이다. 커미션. 10만원짜리. 회사 일 끝나고 집 와서. 밥 먹고 샤워하고. 11시부터 시작. 3시간 그렸다. 러프 끝났다. "색 넣기 전에 레퍼런스 좀 볼까." 픽시브 켰다. 한 시간 지났다. 레퍼런스는 안 찾았다. 그냥 구경했다. 좋아요 눌렀다. 부러웠다. "아 시간 아깝다. 그림 그려야 하는데." 근데 못 끈다. 한 명 더. 이 작가 새 그림 올렸네. 포트폴리오 처음부터 다시 본다. 새벽 3시. "내일 출근인데." 여자친구한테 카톡 왔다. "자?" "아직. 작업 중." 거짓말 아니다. 작업은 하고 있다. 픽시브 보는 것도 작업이라면 작업이다. 아니다. 이건 도피다. 내 그림 그리기 무서워서. 비교당할까 봐. 못 그릴까 봐. 다른 사람 그림 보는 게 더 편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5년 전 내 그림 봤다. 어제. 옛날 파일 정리하다가. "헐. 이게 내가 그린 거야?" 부끄러웠다. 솔직히. 비율도 이상하고. 채색도 어설프고. 구도도 뻔하고. 근데 그때는 최선이었다. 지금 나는 다르다. 확실히 늘었다. 누가 늘려줬나. 회사? 선배? 학원? 아니다. 픽시브였다. 아트스테이션이었다. 매일 봤으니까. 눈이 높아졌으니까. 따라하려고 했으니까.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진짜로. 이건 사실이다. 근데 동시에. 없었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실이다. 이중성 좋아한다. 픽시브. 아트스테이션. 싫어한다. 픽시브. 아트스테이션. 둘 다 진심이다. 고마워. 여기까지 오게 해줘서. 원망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모순이다. 맞다. 근데 이게 현실이다. 매일 아침 핸드폰 켠다. 픽시브 알림 확인한다. "오늘은 자극 안 받고 그냥 감상만 하자." 10분 뒤. "아 진짜. 나는 왜 이 모양이야." 매일 반복이다. 그래도 내일도 볼 거다. 끊을 수 없다. 끊고 싶지도 않다. 이상하게 들린다. 안다. 근데 이게 나다. 5년째 이렇게 산다. 앞으로도 이럴 거다. 결론이랄 것도 없다 픽시브와 아트스테이션.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다. 사실. 없었으면 더 평화로웠다. 그것도 사실. 답이 없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거다. 보고. 배우고. 좌절하고. 그래도 그리고. 내일도 출근한다. 출근길에 픽시브 본다. 또 괴물들 그림 올라와 있겠지. "하아." 한숨 나온다. 근데 뭐. 이게 내 일상이다.매일 보고 매일 흔들린다. 그래도 그린다. 이게 원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