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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크
- 15 Dec, 2025
기획팀과의 신크: 내 머리로 생각한 것과 그들의 상상력이 만나는 지점
회의실 테이블 위의 침묵 화요일 오전 10시. 회의실. 모니터에 내 컨셉이 떴다. 어젯밤 11시까지 잡고 있던 여전사 캐릭터. 갑옷 디자인에 3시간 걸렸다. 망토 펄럭이는 느낌 살리려고 레퍼런스 50개 봤다. "음..." 기획팀장 입에서 나온 첫 소리. 좋은 "음"이 아니다. 5년 하면 안다. 이건 "별로"의 "음"이다. "컨셉은 좋은데요." 여기서 "~은 좋은데"가 나오면 끝이다. 뒤는 안 들어도 안다. "뭔가 우리가 생각한 느낌이 아니라서요." 왔다.우리가 생각한 느낌 "우리가 생각한 느낌"이란 게 뭔데. 기획서엔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전사"라고 써있었다. 그래서 갑옷은 투박하게, 얼굴은 부드럽게 그렸다. 포즈는 당당하게. 색은 차분하게. "좀 더 섹시하게 갈 수 없을까요?" 아. "근데 너무 노골적이면 안 되고요." 어. "강인한 건 유지하면서요." 응? 메모한다. "섹시 + 강인 + 절제". 삼각형 그리고 물음표 세 개. 옆에 앉은 김 과장이 덧붙인다. "참고로 타겟 유저층이 20대 후반 남성이라서요." 알아요. 그거 알고 그렸는데요. "근데 여성 유저도 무시 못 하니까요." 그럼 뭘 그려요. "그 밸런스가 중요한 거죠." 네. 밸런스. 중요하죠. 회의 끝나고 자리 돌아왔다. 모니터 껐다 켰다. PSD 파일 다시 열었다. 레이어 150개. 어제 내 6시간. 휴지통에 넣진 않았다. "버림" 폴더에 옮겼다. 언젠간 쓸 수도. 머릿속 이미지와 기획서 사이 점심시간. 식당 가는 길에 신입 원화가 물어봤다. "선배님, 기획서랑 다르게 그리면 안 돼요?" "응. 안 돼." "그럼 기획서대로만?" "그것도 아니야." "...네?" 설명해줬다. 기획서는 방향이다. 북쪽으로 가라는 거다. 근데 어떻게 가는지는 안 써있다. 걸어갈지 뛰어갈지 우리가 정한다. 문제는 기획팀 머릿속엔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다는 거다. 근데 그걸 말로 표현 못 한다. "강인하면서 여성스러운"같은 말로 포장한다. 우리는 그 말을 해석해서 그린다. 근데 기획팀이 생각한 거랑 다르다. "아 이게 아닌데." 그럼 다시 그린다. 또 다르다. "음, 거의 왔는데." 세 번째쯤 되면 맞다. "오! 이거예요!" 그게 처음 내가 그린 거랑 별 차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럼 처음부터 이렇게 그리시죠?" 못 그려. 기획팀 머릿속이 뭔지 몰라서.그 다음날 아침 수요일 오전 9시 50분. 출근했다. 커피 뽑았다. 자리 앉았다. 어제 회의 내용 다시 봤다. 메모장에 끄적인 키워드들. "섹시", "강인", "절제", "밸런스", "타겟층". 레퍼런스 다시 모았다. 핀터레스트 1시간. "female warrior sexy elegant"로 검색. 나온 건 다 코스프레 사진이다. 아트스테이션으로 넘어갔다. 여기가 낫다. 프로들 작업물 보면 힌트가 있다. 어제 내가 그린 거 다시 켰다. 뭐가 문제였나. 갑옷이 너무 투박했나. 비율이 안 맞나. 표정이 딱딱한가. 30분 봐도 모르겠다. 그냥 다시 그린다. 새 캔버스. 러프부터. 이번엔 갑옷을 좀 줄였다. 어깨랑 가슴 부분만 남기고 팔은 노출. 허벅지도 살짝. 근데 너무 노골적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망토를 길게. 포즈를 바꿨다. 어제는 정면 직립이었다면 오늘은 살짝 비틀었다. 검은 어깨에 메고. 한 손은 허리에. 표정도 수정. 어제는 무표정이었다면 오늘은 미소. 근데 방긋 웃는 게 아니라 비웃는 느낌. "강인함" 살리려고. 3시간 걸렸다. 러프 완성. 팀장한테 슬랙 보냈다. "1차 수정본입니다." 답장 왔다. "오후에 봐요."상상력의 간극 오후 3시. 다시 회의실. 모니터에 수정본 띄웠다. 팀장이 턱을 괴고 봤다. 김 과장도 봤다. 기획팀 막내도 봤다. 10초. 20초. "오." 좋은 "오"다. 이건 안다. "이게 낫네요." 왔다. "근데 표정이 좀 세 보여서요. 조금만 부드럽게 갈 수 있을까요?" 네. 갈 수 있죠. "그리고 망토가 너무 길어서 실루엣이 무거워 보이는데, 짧게 해도 될까요?" 네. 되죠. "갑옷 색상도 좀 밝게요.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답답해 보여요." 네네. 밝게요. 메모했다. "표정 부드럽게", "망토 짧게", "색상 밝게". 회의 끝나고 나왔다. 복도에서 숨 쉬었다. 괜찮다. 리비전 2차. 보통이다. 6차까지 간 적도 있다. 자리 돌아와서 수정 시작했다. 표정은 입꼬리 내렸다. 망토는 무릎까지. 갑옷 색상은 채도 올리고 명도 올렸다. 1시간 만에 끝났다. 다시 보냈다. 30분 후 답장. "OK. 이거로 갑시다." 됐다. 파일 저장하면서 생각했다. 처음 그린 거랑 뭐가 달라진 건가. 갑옷 노출 늘고 망토 짧아지고 색 밝아졌다. 근데 "강인하면서 여성스러운 전사"라는 컨셉은 그대로다. 변한 건 표현 방식. 그게 기획팀이 원한 거다. 같은 말, 다른 그림. 내 머리와 그들의 머리 저녁 7시. 퇴근 준비하면서 오늘 작업 돌아봤다. 기획팀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도 고민한다. 유저가 뭘 좋아할지. 어떤 캐릭터가 팔릴지. 근데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머릿속 이미지를 종이에 옮기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설명한다.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나는 그림은 그리는데 기획을 못 한다. 유저 취향, 시장 트렌드, 수익 구조.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실에서 만난다. 그들의 말과 내 그림이 부딪힌다. 한 번에 안 맞는다. 두 번, 세 번 조정한다. 그게 "신크"다. 처음엔 답답했다. "왜 내 그림대로 안 가는 거야." 3년 차까지 그랬다. 지금은 안다. 이게 회사다. 내 그림이 아니라 우리 게임이다. 그래도 가끔은 서럽다. 어제 밤 11시까지 붙잡고 있던 갑옷 디자인. "버림" 폴더에 쌓여간다. 언젠간 쓸 거다. 내 게임 만들 때. 프리랜서 되면. 1인 개발 하면. 그때까지는 참는다. 집 가서 개인 작업 켰다. 여기선 내가 기획자다. 맘대로 그린다. 그게 숨통이다.내일도 회의실. 또 맞춰볼 거다. 그들의 상상력과 내 손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