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달라는
- 09 Dec, 2025
캐릭터를 '좀 더 섹시하게' 달라는 요청의 심리 분석
오전 10시 47분, 슬랙 알림 회의실에서 돌아왔다. 기획팀장이 던진 말 하나. "이 캐릭터, 좀 더 섹시하게 해주세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내렸다. 화면에는 내가 사흘 밤낮 그린 여전사 컨셉이 떠 있다. 갑옷 입고 검 든 캐릭터. 나름 멋있게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손이 안 움직인다. 섹시. 섹시하게. 더 섹시하게. 이 단어의 정의가 뭔지 아는 사람 있나.섹시의 52가지 정의 일단 레퍼런스부터 찾았다. 아트스테이션에 'sexy character' 검색. 나오는 건 죄다 다르다. 어떤 건 노출이 많다. 어떤 건 포즈가 야하다. 어떤 건 그냥 얼굴이 예쁘다. 우리 팀장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슬랙에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3분. "팀장님, 섹시의 방향성이 어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노출도를 높이는 건지, 실루엣을 강조하는 건지, 아니면 포즈나 표정 쪽인지..." 답장이 왔다. 7분 후. "음... 그냥 좀 더 매력적으로요. 느낌 아시죠?" 모른다. 전혀 모른다. '느낌 아시죠'는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오후 2시, 첫 번째 시도 일단 그려봤다. 허벅지를 좀 더 드러냈다. 갑옷 하의를 짧게. 어깨 갑옷도 좀 줄이고. 30분 작업. 팀 리뷰에 올렸다. 기획팀장: "음... 이건 좀 야한 것 같은데요?" 나: "...?" 아까 섹시하게 하라며. 기획팀장: "섹시한 건 맞는데, 너무 노골적이면 유저들이 거부감 느낄 수도 있잖아요." 손이 멈췄다. 그럼 대체 어느 선이냐고. "좀 더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이요." 우아. 섹시. 우아하면서 섹시. 모순 아닌가. 저장도 안 하고 레이어 삭제했다. 오후 4시, 두 번째 시도 이번엔 포즈를 바꿨다. S라인을 강조한 포즈. 허리를 꺾고 가슴을 내밀고 엉덩이를 뒤로. 전형적인 '섹시 포즈'다. 핀터레스트에서 100번은 본 구도. 그리면서도 찝찝했다. 이 자세로 싸우면 허리 나간다. 하지만 일단 그렸다. 1시간 반. 팀 채널에 올렸다. 아트 디렉터가 답했다. "포즈가 너무 어색해요.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자연스러운 섹시 포즈. 이게 뭔 말인지 아는 사람.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철학자가 아니다.섹시 요청의 심리학 곰곰이 생각해봤다. 왜 사람들은 '섹시하게'라고 말할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첫째, 본인도 모른다. 그냥 지금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를 때. "좀 더 섹시하게"라고 하면 그럴싸해 보인다. 둘째, 책임 회피다. "노출 늘려주세요"라고 하면 나중에 문제 생길 때 본인 말이 된다. "섹시하게"는 애매해서 책임 안 진다. 셋째, 성적 매력을 직접 언급하기 민망하다. 회사에서 "가슴을 더 크게", "다리를 더 길게" 이런 말 못 한다. HR 들어가면 끝이다. 그래서 '섹시'라는 완곡어법을 쓴다. 결국 나는 마인드 리더가 되어야 한다. 아트 디렉터가 아니라 심리학자. 대학에서 인체 해부학은 배웠는데 심리학은 안 배웠다. 오후 6시, 질문의 용기 참다가 물어봤다. 회의실에 기획팀장 불렀다. "팀장님, 죄송한데요. '섹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어색한 침묵. 3초 정도. "아... 그러니까... 음..." 팀장도 모른다. 확신했다. "예를 들어, 레퍼런스 같은 거 있으세요? 이런 느낌이다 하는." "아... 레퍼런스요... 음..." 핸드폰을 꺼내더니 게임 몇 개 보여줬다. 다 다른 스타일이었다. 검은사막, 니어 오토마타, 페르소나. "이런 느낌들이요." 이 셋의 공통점을 찾으라는 건가. 그냥 "예쁜 여캐"가 공통점 아닌가. 하지만 뭔가 실마리는 잡혔다. "아, 그럼 실루엣이 살면서 의상이 타이트한 느낌인가요?" "네! 그거요! 그런 느낌!" 드디어. 30분 만에 하나 건졌다. [PROMPT_THUMBNAIL: anime style illustration, Korean male concept artist having discussion with team leader in meeting room, laptop showing various character designs, both looking at reference images on phone, soft office lighting, Studio Ghibli aesthetic, warm collaborative atmosphere, manga style, game development scene] 저녁 8시, 세 번째 시도 레퍼런스 보고 다시 그렸다. 갑옷은 유지하되 실루엣이 살도록. 타이트한 느낌. 몸의 라인을 따라가는 디자인. 노출은 줄이고 핏은 살렸다. 포즈도 자연스럽게. 싸우는 자세인데 역동적이고. 2시간 걸렸다. 팀 채널에 올렸다. 30분 후. 기획팀장: "오! 이거 좋은데요?" 아트 디렉터: "이 방향 괜찮습니다." 프로그래머: "멋있네요." 드디어. 겉으로는 "감사합니다"라고 쳤지만.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이걸 왜 처음부터 말 안 해. 밤 10시, 혼자 정리 퇴근하고 집에 왔다. 타블렛 앞에 앉았다. 개인 작업 하려고. 손이 안 움직인다. 오늘 하루 종일 그렸는데 또 그리기 싫다. 그냥 유튜브 켰다. 게임 원화 메이킹 영상. 댓글에 누가 썼다. "기획팀이 맨날 애매하게 지시해서 힘들어요 ㅠㅠ" 공감. 100% 공감.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원화가의 90%가 겪는 일이다. "더 멋있게", "더 예쁘게", "더 섹시하게". 형용사로 지시하는 사람들. 우리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애매한 형용사를 구체적인 시각 언어로. 그게 우리 일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그림 그리는 거고. 누가 미대 입시할 때 이런 거 알려주나. 실기 시험에 '애매한 지시 번역하기' 과목 있나. 없다. 현장에서 깨진다. 섹시의 정답 결국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섹시의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노출이 섹시다. 어떤 사람은 신비로운 게 섹시다. 어떤 사람은 강한 여자가 섹시다. 어떤 사람은 청순한 게 섹시다. 기획팀장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냥 "뭔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 그걸 '섹시하게'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우리는 그 포장을 뜯어야 한다. 질문으로. "어떤 섹시함인가요?" "레퍼런스 있나요?" "이런 방향인가요, 저런 방향인가요?" 민망해도 물어야 한다. 안 물어보면 3번 그린다. 나처럼. 물어보면 1번 반에 끝난다. 시간은 돈이다. 내 저녁 시간도 돈이다. 내일 할 일 내일은 남자 캐릭터 컨셉 회의다. 이번엔 기획팀이 뭐라고 할까. "좀 더 간지나게 해주세요"? "더 카리스마 있게"? 벌써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 물어볼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인지 말씀해주세요." "레퍼런스 있으시면 공유해주세요." 5년 차면 이제 이 정도 배짱은 있다. 신입 때는 눈치 보느라 묻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안다. 애매한 지시를 그대로 받는 게 오히려 무책임이라는 걸. 명확하게 만드는 게 프로다. 타블렛 덮었다. 내일 또 싸운다. 애매한 형용사들과."섹시하게"는 지시가 아니다. 숙제 문제다. 정답은 대화로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