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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 06 Dec, 2025
리비전 몇 차에요: 끝이 안 보이는 수정의 악순환
리비전 몇 차에요: 끝이 안 보이는 수정의 악순환 1차라던 그 말 월요일 아침이었다. 팀장님이 말했다. "이번 신규 캐릭터, 1차 리비전만 하면 될 거야." 믿었다. 그때의 나는 순수했다. 지금 금요일 오후 6시. 5차 리비전 파일을 저장하고 있다. PSD 용량이 2GB를 넘었다. 레이어가 347개다. 1차에서 끝날 거라던 그 말.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모두가 착각했을 뿐.회의록을 다시 봤다. '캐릭터 콘셉트 1차 수정 후 확정'이라고 적혀있다. 확정. 그 단어가 이렇게 무의미할 줄은. 리비전의 시작은 언제나 사소하게 1차 리비전 요청은 간단했다. "머리 색 좀 더 밝게, 의상 디테일 추가." 2시간 작업이다. 점심 먹고 오후에 뚝딱. 메일 보냈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답장이 30분 만에 왔다. "아, 그리고 기획팀에서 컨셉이 좀 바뀌었는데..."2차 리비전. 의상 전체 변경. "중세풍에서 현대풍으로 바꾸래. 근데 판타지 느낌은 살리고." 모순이다. 그래도 한다. 이게 일이니까. 하루 걸렸다. 레퍼런스 50개 찾고, 러프 5개 그리고, 그중 하나 골라서 디테일 작업. "좋은데, 좀 더 역동적으로 안 될까?" 3차다. 포즈를 바꿨다. A자 포즈에서 액션 포즈로. "음... 이것도 좋은데, 1차 때 포즈가 더 나았던 것 같기도?"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리비전이 늘어나는 진짜 이유 4차 리비전 요청을 받을 때쯤 깨달았다. 아무도 확신이 없다는 것을. 기획팀은 이 캐릭터가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니, 안다. 근데 자주 바뀐다. 어제는 탱커였다가 오늘은 딜러다. 내일은 서포터일지도. PD는 '느낌'으로 판단한다. "뭔가 2% 부족해." 그 2%가 뭔데요. "그걸 내가 알면 내가 그리지."마케팅팀은 또 다른 의견을 낸다. "이 캐릭터, 여성 유저한테 어필이 안 될 것 같은데." 기획서에는 남성 타겟이라고 적혀있다. 일주일 전에 확정했다. "아, 타겟이 좀 바뀌었어." 언제요. "어제 회의에서." 저 그 회의 없었는데요. "아 맞다. 너 그때 작업 중이었지." 5차 리비전 시작. 끝나지 않는 이유 리비전이 계속되는 건 결정권자가 명확하지 않아서다. 우리 팀은 민주적이다. 너무 민주적이다. PD가 OK 해도 기획팀장이 NO 하면 다시다. 기획팀장이 OK 해도 마케팅이 불안해하면 다시다. 모두의 의견을 듣는다.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그런 날은 안 온다. 어제 회의에서 누군가 말했다. "1차 때 버전이 제일 나았던 것 같은데." 1차. 그게 4주 전이다. 나는 PSD 파일을 열었다. 히스토리를 쭉 올려봤다. 1차 버전이 있었다. 레이어 80개짜리. 지금은 347개다. 뭐가 나아진 걸까. 밤 11시의 깨달음 야근 중이다. 또. 5차 리비전 파일을 보고 있다. 문득 든 생각. '누구를 위한 수정인가.' 캐릭터는 나아졌나. 잘 모르겠다. 회의 때마다 "더 좋아졌어"라고들 한다. 근데 뭐가. 디테일은 늘었다. 레이어도 늘었다. 작업 시간도 늘었다. 근데 임팩트는. 1차 때 그 단순한 실루엣이 더 강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동기한테 카톡했다. "리비전 몇 차까지 해봤어?" "7차." 위로가 됐다. 아직 멀었구나. "끝은 어떻게 났어?" "마감일이 와서." 결국 시간이 끝내주는 거다. 퀄리티가 아니라. 리비전 지옥 탈출법 해답은 없다. 근데 패턴은 있다. 리비전이 3차 넘어가면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컨셉이 명확하지 않거나, 결정권자가 확신이 없거나. 이럴 땐 그림을 더 그리는 게 답이 아니다. 회의가 답이다. 제대로 된.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3차쯤에. 5차까지 오면 늦다. 이미 모두가 지쳤고, 원본이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난다. 근데 그걸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분위기가 있다. '알아서 하는 게 프로지'라는.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고 계속 그린다. 금요일 밤의 회의 오늘 5차 리비전 제출했다. 팀장님이 한참 보시더니 말했다. "1차 때 버전이랑 비교해서 보여줄 수 있어?" 보여드렸다. 30초 침묵. "1차가 낫네." 4주가 1초 만에 무너졌다. "그럼 1차로 갑시다." 회의실을 나왔다. 허탈했다. 근데 또 이해는 됐다. 1차 때는 몰랐다. 뭐가 좋은지. 2, 3, 4, 5차를 거치면서 알게 됐다. 뭐가 안 좋은지. 그래서 다시 1차로 돌아갔다. 돌고 돌아 제자리. 이게 리비전이다. 그래도 월요일은 온다 주말이다. 개인 작업을 하려고 타블렛을 켰다. 근데 손이 안 간다. 이번 주에 리비전만 5개 했다.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수정을 한 거다. 창작이 아니라 대응. 다음 주 월요일이면 또 다른 캐릭터 컨셉이 들어온다. "이번엔 1차에서 끝낼 수 있을 거야." 또 그 말을 들을 것이다. 또 믿을 것이다. 또 5차까지 갈 것이다. 이게 게임 회사 컨셉 아티스트의 일상이다. 리비전 몇 차냐고 물어보면 웃으면서 답한다. "세어본 적 없어." 세면 우울해지니까.1차에서 끝난다는 말, 이제 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