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1주일 전의 기획 변경은 전쟁이다

마감 1주일 전의 기획 변경은 전쟁이다

마감 1주일 전의 기획 변경은 전쟁이다

월요일, 그날의 시작

월요일 오전 10시. 출근했다. 책상에 앉아서 타블렛 켰다. 지난주 금요일에 마무리한 캐릭터 컨셉 10개가 폴더에 정리돼 있었다.

“이번 주는 디테일 작업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기획팀장이 지난주에 “이 방향으로 가요”라고 했었다. 메인 캐릭터 컨셉 3개, 서브 캐릭터 7개. 일주일 동안 밤 11시까지 남아서 그린 거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파스 냄새가 났다. 어제 붙인 거다.

커피 마시면서 아트스테이션 확인했다. 해외 아티스트들 작업물이 쭉 올라와 있었다. “저 퀄리티는 어떻게 나오는 거야.” 한숨 나왔다.

오전 회의가 11시였다. 기획팀, 아트팀, 프로그래밍팀 합동. 마감이 2주 남았으니까 진행 상황 체크하는 자리.

회의실 들어갔다. 노트북 펴고 컨셉 파일 준비했다. 기획팀장이 먼저 말했다.

“저, 그 캐릭터 컨셉 말이에요.”

심장이 철렁했다. 이 말투는 안 좋은 거다. 5년 경력으로 안다.

회의실에서의 폭탄 선언

“윗분들이 어제 시안 보시고.”

기획팀장이 말을 이었다.

“방향을 좀 바꾸자고 하셨어요.”

아트팀 팀장이 물었다. “어느 부분이요?”

“컨셉 자체를요.”

정적.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노트북 팬 소리만 들렸다.

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우스를 꽉 쥐었다.

“구체적으로 뭘 바꿔야 하는데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기획팀장이 자료를 띄웠다. 다른 게임 캐릭터들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가자고 하세요.”

보는 순간 알았다. 완전히 다른 컨셉이었다. 우리가 한 건 판타지 느낌. 그쪽은 SF 메카닉.

”…이건 다시 그려야 하는데요.”

아트팀 팀장이 말했다.

“마감이 2주인데 가능해요?”

“해야죠. 뭐.”

기획팀장이 대답했다. 미안한 표정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프로그래밍팀 팀장이 한숨 쉬었다. “우리도 애니메이션 다시 짜야 하네.”

회의는 1시간 걸렸다. 결론은 하나. 다시 그린다.

그날 밤 11시의 슬랙

회의 끝나고 책상 돌아왔다. 점심은 못 먹었다. 입맛이 없었다.

폴더를 열었다. 일주일 동안 그린 컨셉들. 레이어가 200개 넘는 파일들. 러프 50장, 완성 10장.

“이게 다 물거품이네.”

혼잣말했다. 옆자리 선배가 들었는지 말했다.

“처음은 아니잖아. 우리.”

맞다.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후 내내 새 레퍼런스 찾았다. SF 메카닉 느낌. 핀터레스트, 아트스테이션 뒤졌다. 눈이 아팠다.

저녁 7시. 사람들 하나둘 퇴근했다. 나는 남았다. 팀장이랑 선배 둘도 남았다.

“치킨 시킬까요?”

팀장이 물었다. “네.”

대답했다. 배는 고팠다.

밤 9시. 러프 스케치 10개 나왔다. 퀄리티는 애매했다. 당연하다. 하루 만에 나온 거니까.

밤 10시. 슬랙에 알림 떴다. 기획팀장이었다.

“내일 오전에 러프 공유 부탁드려요.”

“네.”

답장 보냈다. 짧게.

밤 11시. 슬랙에 또 알림. 이번엔 기획팀 막내.

“아, 그리고요.”

심장이 또 철렁했다. 밤 11시의 “그리고요”는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메인 캐릭터 성별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네?”

“남자로 기획했는데 여자로 가자고 하세요.”

손이 멈췄다. 타블렛 펜을 놓았다.

“지금이요?”

“죄송해요 ㅠㅠ 저도 방금 들었어요.”

이모티콘까지 붙었다. 미안한 건 알겠다. 하지만.

키보드를 쳤다. 지우고 다시 쳤다.

“내일 아침까지 수정할게요.”

전송.

멘붕의 시작

책상에 엎드렸다. 5분. 아니, 10분쯤 그랬던 것 같다.

팀장이 물었다. “괜찮아?”

“네.”

일어났다. 괜찮지 않았다.

파일 새로 열었다. 러프 10개 중에 메인 캐릭터 3개. 남자로 그린 거. 이걸 여자로 바꾼다.

체형부터 다르다. 의상도 다르다. 실루엣 자체가 달라진다.

“시발.”

욕이 나왔다. 작게. 팀장이 못 들을 정도로.

마우스 잡았다. 레이어 지웠다. 새로 그렸다.

시간 확인했다. 밤 11시 30분.

여자친구한테 카톡 왔다. “언제 와?”

“12시쯤?”

거짓말이었다. 어림없다. 2시는 돼야 나갈 것 같았다.

“또 야근이야? ㅠㅠ”

“응. 미안.”

“몸 챙겨.”

“ㅇㅇ”

답장 보내고 폰 뒤집었다.

새벽 2시의 결과물

새벽 1시. 러프가 나왔다. 여자 메인 캐릭터. SF 메카닉 느낌.

퀄리티는. 글쎄.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내일 아침 회의가 10시. 지금 퇴근해도 5시간밖에 못 잔다.

파일 저장했다. 슬랙에 올렸다.

“러프 올립니다. 내일 아침에 확인 부탁드려요.”

전송하고 컴퓨터 껐다.

팀장이 말했다. “고생했어. 들어가.”

“네. 팀장님도요.”

사무실 나왔다. 건물 밖은 추웠다. 11월이었다.

택시 잡았다. 기사님이 물었다. “야근하셨어요?”

“네.”

“요즘 다들 힘드시네요.”

“그러게요.”

차 안에서 눈 감았다. 머릿속에 캐릭터 러프가 보였다. 선이 떨렸다. 피곤해서 손이 떨린 거다.

“다 부질없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일주일 그린 게 하루 만에 날아갔다. 내일 그릴 것도 또 바뀔 수 있다.

집 도착했다. 2시 30분.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 봤다. 트위터 알림이 30개. 내 팬아트에 좋아요 달린 거.

“이게 진짜 하고 싶은 그림인데.”

중얼거렸다.

잠들었다. 꿈에서도 그림 그렸다. 악몽이었다.

다음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깼다. 8시. 4시간 잤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손목도 아팠다. 어깨도 뻐근했다.

씻고 나왔다. 거울 봤다. 다크서클이 입술까지 내려왔다.

“망했다.”

출근 준비했다.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입었다. 갈아입을 기력이 없었다.

편의점 들렀다. 박카스 두 개 샀다. 레드불도 하나.

9시 30분 출근. 30분 일찍 왔다. 러프 수정할 게 있을 것 같아서.

책상 앉았다. 슬랙 열었다.

기획팀장 메시지. 새벽 3시에 온 거.

“러프 확인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괜찮은데요.”

숨을 쉬었다. 조금 안심했다.

“한 가지만 수정 부탁드려요.”

또 왔다.

“메인 캐릭터 의상을 좀 더 화려하게 해주세요.”

”…”

키보드 쳤다.

“알겠습니다.”

10시 회의. 러프 보여줬다. 반응은 괜찮았다.

“이 방향으로 가죠.”

기획팀장이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완성본 부탁드려요.”

일주일. 디테일 작업에 일주일. 원래 일정이랑 똑같다.

하지만 원래 일정은 러프가 이미 있었다. 지금은 어제 밤에 그린 게 전부다.

“네. 하겠습니다.”

대답했다.

회의 끝나고 자리 왔다. 선배가 말했다.

“살아남았네.”

“아직 모르죠.”

“뭐, 또 바뀔 수도 있지.”

웃었다. 웃긴지 슬픈지 모르겠다.

마감까지 일주일

그날부터 일주일이 지옥이었다.

매일 밤 10시 퇴근. 주말도 나왔다. 토요일 8시간, 일요일 6시간.

손목에 파스 5장 붙였다. 효과는 없었다. 그냥 그렸다.

기획 변경은 두 번 더 있었다. 소소한 거. 의상 색상, 무기 디자인.

“이건 애교지.”

팀장이 말했다. 맞다. 성별 바뀌는 것보단 낫다.

여자친구랑은 일주일 동안 못 만났다. 카톡만 했다. 전화할 기력도 없었다.

“이번 주만 지나면 괜찮아.”

거짓말했다. 다음 프로젝트도 있다. 또 반복된다.

금요일 밤. 최종 파일 제출했다. 메인 캐릭터 3개, 서브 7개. 총 10개.

기획팀장이 확인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슬랙 메시지.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이모티콘 세 개. 박수, 파이팅, 맥주.

팀장이 말했다. “회식 가자.”

“네.”

고깃집 갔다. 고기 구웠다. 소주 마셨다.

취했다. 많이.

집 들어와서 침대에 쓰러졌다. 옷도 안 벗었다.

핸드폰 봤다. 트위터. 내 팬아트가 리트윗 500개.

“이게 진짜 하고 싶은 거야.”

말했다. 아무도 안 들었다.

잠들었다.

월요일, 그리고

월요일 출근했다. 10시.

책상 앉았다. 슬랙 열었다.

기획팀장 메시지.

“고생하셨습니다. 최종 승인 났어요.”

안도했다.

“다음 프로젝트 기획안 공유합니다.”

파일 첨부.

열었다.

“신규 캐릭터 20개.”

“마감 3주.”

”…”

커피 마셨다. 쓰디쓴 맛.

타블렛 켰다.

시작이다. 또.


마감 전 기획 변경은 일상이다. 익숙해지지 않지만 계속된다. 그게 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