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에 퇴근? 마감 전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진실
- 16 Dec, 2025
저녁 7시에 퇴근? 마감 전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진실
계약서에 적힌 퇴근 시간
입사할 때 계약서에는 “10:00 ~ 19:00”라고 적혀 있었다.
신입 시절엔 진짜 7시에 퇴근했다. 정확히는 7시 5분. 가방 챙겨서 나가면 7시 10분쯤 회사 문 나섰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마감 3개월 전이었다는 걸.
지금은 7시에 퇴근하면 눈치가 보인다. 아니,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7시면 이제 슬슬 디렉터 피드백이 들어오는 시간이다.
“이 캐릭터 표정 좀 더 살려주세요.” “실루엣이 약한 것 같은데요.” “기획팀에서 컨셉 방향 바뀌었대요.”
7시는 하루의 끝이 아니라 2라운드 시작이다.

마감 2주 전의 풍경
마감 2주 전부터는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오전 10시 출근. 점심 1시. 저녁 7시. 여기까진 정상이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다. 9시, 10시, 11시. 시계는 돌아가는데 사람은 못 나간다.
어제는 새벽 1시에 퇴근했다. 집 가서 씻고 누우니 2시. 알람은 8시 반. 6시간 반 잤다.
오늘은 10시 반에 겨우 나왔다. 내일은? 모른다. 금요일인데도 주말 출근 얘기가 나왔다.
“토요일 오후에 한 번 모여서 리뷰하죠.”
한 번이 3시간이다. 경험상 5시간이다.

회사는 9시 퇴근을 야근으로 안 친다
재밌는 건 이게 공식적으론 야근이 아니라는 거다.
야근 수당? 없다. 연봉제니까. 대신 ‘마감 보너스’가 있다. 게임 출시하면 받는다.
출시가 내년 3월이면 보너스는 내년 5월쯤 나온다. 지금은 11월이다. 6개월 뒤다.
지금 매일 밤 11시까지 남아서 그리는 이 캐릭터가, 6개월 뒤 보너스로 돌아온다.
보너스가 500만원이라고 치자. 괜찮은 금액이다.
그런데 계산해보면 이렇다. 2개월간 매일 3시간 추가 근무. 주말 포함하면 60일 × 3시간 = 180시간. 시급으로 따지면 2만 7천원.
내 시급보다 싸다.

7시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날
그래도 가끔은 7시에 나간다.
디렉터가 휴가 갔을 때. 기획팀이 다 외근 갔을 때. 빌드 데이(개발팀이 데이터 합치는 날)일 때.
이럴 땐 미련 없이 7시 땡 하고 나간다.
가방 챙기는 속도가 평소의 3배다.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것도 아깝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간다.
회사 밖 공기가 이렇게 좋았나 싶다. 7시 하늘이 이렇게 밝았나 싶다.
편의점에서 맥주 사서 집 가는 지하철이 천국이다.
근데 이런 날이 한 달에 2번 있을까 말까다.
주말도 없는 마감 시즌
마감 1개월 전부터는 주말 개념이 흐려진다.
“일요일은 쉬자”는 팀장님 말씀. 고맙다. 진심이다.
근데 토요일은 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토요일 오후 2시 출근.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전은 잤으니까.
근데 퇴근이 밤 10시다. 8시간 일했다. 평일이랑 똑같다.
일요일은 집에서 쉰다. 근데 저녁 8시쯤 메신저가 운다.
“내일 아침 회의 전에 이거 수정 좀 부탁드려요.”
그림 켜서 2시간 작업한다. 일요일 저녁 10시. 일주일이 다시 시작됐다.
정시 퇴근하는 다른 회사 친구들
대학 동기 중에 비게임 업계 간 친구가 있다.
광고 쪽 일러스트레이터다. 프리랜서.
얘는 6시에 일 끝난다. 저녁 약속 잡으면 7시에 홍대에서 만난다.
나는? 7시 반에 “미안 좀 늦을 것 같아”라고 문자 보낸다. 9시에 “진짜 미안 오늘 못 갈 듯”이라고 또 보낸다.
약속을 세 번 연속 취소하면 친구가 말한다.
“너 요즘 바쁘지? 마감 끝나고 보자.”
고맙다. 이해해줘서.
근데 속으로는 생각한다. 게임 회사는 마감이 끝나면 다음 마감이 시작된다고.
몸이 기억하는 퇴근 시간
요즘은 7시가 되면 몸이 반응한다.
배가 고프다.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피곤하다. 9시간 일했으니까.
근데 못 나간다. 디렉터가 아직 자리에 있다. 팀장도 있다. 옆자리 선배도 그리고 있다.
나만 나갈 수가 없다.
8시쯤 되면 적응한다. ‘오늘도 9시 퇴근이구나.’
9시쯤 되면 또 적응한다. ‘오늘은 10시네.’
10시쯤 되면 체념한다. ‘11시에는 나가자.’
11시에 겨우 집 도착하면 12시다. 씻고 밥 먹으면 1시다.
누우면 2시다. 알람은 8시 반이다.
이게 반복되면 몸이 기억한다. 7시는 퇴근 시간이 아니라는 걸.
건강검진 결과지의 경고
지난달에 건강검진 받았다.
간 수치 높음. 수면 부족. 거북목. 손목터널증후군 의심.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직업이 뭐세요?” “게임 회사 원화가요.” “아… 야근 많이 하시죠?” “네.” “좀 줄이셔야 해요.”
줄이고 싶다. 진심으로.
근데 어떻게? 마감은 정해져 있다. 작업량은 정해져 있다. 인력은 안 늘어난다.
결국 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손목은 매일 밤 아프다. 파스 붙이고 잔다. 아침에는 괜찮다. 저녁 되면 또 아프다.
병원 가고 싶다. 근데 병원은 6시에 끝난다. 나는 7시에도 못 나간다.
이게 정상인가 싶을 때
가끔 의문이 든다.
이게 맞나? 이게 정상인가?
게임 만드는 게 좋아서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근데 요즘은 퇴근하고 그림 그릴 힘이 없다.
주말에 개인 작업 하려고 타블렛 켜면 손이 안 움직인다. 이미 한 주 동안 12시간씩 그렸으니까.
트위터에 팬아트 올리던 것도 한 달째 못했다. 팔로워들이 걱정한다.
“요즘 바쁘신가봐요ㅠㅠ”
바쁘다. 정말 바쁘다.
근데 이게 바쁜 게 맞나? 아니면 회사가 이상한 거나?
주변 게임 회사 다니는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도 그래. 마감 시즌은 원래 그래.”
그럼 이게 정상인가보다. 게임 업계는 원래 이런가보다.
그래도 버티는 이유
그럼에도 버틴다.
출시되면 다르다. 게임이 나오고 유저들이 “이 캐릭터 예쁘다”고 하면 다르다.
내가 그린 캐릭터가 움직이고,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면, 그때는 보람이 있다.
마감 끝나고 회식할 때, 팀장이 “고생했다”고 할 때, 동료들이랑 “드디어 끝났다”고 할 때.
그때는 괜찮다. 힘들었던 게 다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덜 바쁠 거예요.”
라는 기획팀 말을 믿으면서.
또 시작한다. 10시 출근, 7시는 꿈, 9시는 기본, 11시는 일상.
이게 게임 회사 원화가의 현실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7시에 퇴근하고 싶다.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3번만이라도.
저녁에 여자친구랑 밥 먹고 싶다. 영화 보고 싶다. 10시 영화가 아니라 8시 영화.
주말에 그림 연습하고 싶다. 회사 일 말고 내 그림.
손목 아프면 병원 가고 싶다. 휴가 내지 않고.
이게 꿈이다. 거창한 거 아니다. 그냥 계약서에 적힌 시간에 퇴근하는 것.
그게 꿈인 직장인이 있다는 게 이상하긴 하다.
근데 뭐 어쩌겠나. 이게 현실인걸.
오늘은 금요일인데 토요일 출근이다. 주말이 짧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