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팀 리뷰: 모두가 침묵하는 순간
- 13 Dec, 2025
오후 3시의 팀 리뷰: 모두가 침묵하는 순간
아트보드에 올린 순간
3시 정각. 슬랙에 메시지 날렸다. “이번 주 작업물 아트보드에 올렸습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우스 클릭하는데 2초 걸렸다. 일주일 동안 붙잡고 있던 신규 캐릭터 컨셉 3종. 러프부터 최종 렌더링까지 총 42시간.
파일명: NewChar_Concept_v3_final_real.psd
업로드 버튼 누르고 화장실 갔다. 손 씻으면서 스마트폰 확인. 아무 반응 없음.

10분이 지났다
자리 돌아와서 슬랙 다시 봤다. 읽음 표시 7명. 댓글 0개.
모니터 두 개 켜놨다. 왼쪽엔 슬랙, 오른쪽엔 아트보드. 내 그림 보면서 다시 체크했다.
실루엣 괜찮다. 컬러 밸런스도 맞다. 디테일도 살렸다. 레퍼런스 20장 뒤져가며 그린 거다. 기획서 요구사항 다 반영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안 달지.
옆자리 김 과장 모니터 슬쩍 봤다. 아트보드 켜져 있다. 내 그림 보고 있다. 스크롤 내리고 있다. 그런데 타이핑은 안 한다.
심장 빨리 뛴다.

침묵의 종류
게임 회사 5년 다니면서 배운 거 있다. 침묵은 종류가 있다는 것.
좋은 침묵:
- 모두가 만족해서 할 말이 없는 침묵 (본 적 없음)
- 너무 완벽해서 피드백할 게 없는 침묵 (이것도 본 적 없음)
나쁜 침묵:
-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
- 너무 별로인데 말하기 애매해서 침묵
- 수정 요청하기 미안해서 침묵
- 관심 없어서 침묵
지금 이게 뭔지 모르겠다. 그게 제일 무섭다.
차라리 “여기 이상한데요” 하나가 백 번 낫다. “전체적으로 다시 가져가시죠” 도 괜찮다. 뭐라도 달아줘.
3시 12분. 여전히 댓글 없음.
리더가 말했다
3시 15분. 아트 리드 박 팀장이 댓글 달았다. “3시 반에 회의실로 모이시죠.”
끝.
이게 뭐야.
회의실 소집이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칭찬하려고 부르는 건 아닐 거다. 칭찬은 슬랙에 이모지로 한다. 수정 요청이면 “여기 좀” 하고 끝이다.
회의실은 심각한 얘기할 때다. “컨셉 방향을 전면 수정합니다” 같은 거.
타블렛 펜 만지작거렸다. 15분 남았다.
옆자리 이 사원이 물었다. “형, 물 마실래요?” “응.”
목이 말랐다.

회의실 문 앞
3시 28분. 일찍 도착했다.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텅 비어 있다.
의자 7개. 빔 프로젝터 하나. 화이트보드. 저기서 내 그림 까이는 거다.
손에 땀 났다. 노트북 들고 서 있다. 일찍 들어가서 세팅할까. 아니면 밖에서 기다릴까.
3시 29분. 박 팀장 왔다. “어, 벌써 왔어요?” “네.”
같이 들어갔다. 노트북 켰다. 내 파일 미리 띄워놨다.
3시 30분. 다른 팀원들 들어왔다. 김 과장, 이 사원, 최 선임, 기획팀 정 과장.
다들 표정이 애매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얼굴.
회의 시작했다.
첫마디
박 팀장이 말했다. “다들 봤죠?”
고개 끄덕임. 다섯 명.
“어떻게 생각하세요?”
침묵.
5초 지났다. 아무도 안 말한다.
최 선임이 먼저 입 열었다. “음… 전체적으로는…”
멈췄다.
“괜찮은 것 같은데…”
또 멈췄다.
“근데 뭔가…”
끝까지 안 말한다.
이게 제일 답답하다.
누군가 말했다
기획팀 정 과장이 말했다. “저는 좋은 것 같은데요.”
반가웠다. 누군가 긍정적 멘트.
“근데 기획 의도랑 조금…”
식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끝났다.
기획서 10번 읽었다. 요구사항 체크리스트 만들어서 확인했다. 다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부분이요?” 내가 물었다.
“전체적인 느낌이요.”
전체적인 느낌.
이게 제일 막연하다. 뭘 고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루엣? 컬러? 의상? 표정?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다른가요?” 다시 물었다.
정 과장이 한숨 쉬었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설명하기 어�우면 내가 어떻게 고치냐.
두 번째 침묵
회의실 에어컨 소리만 들린다.
박 팀장이 스크롤 내렸다. 내 컨셉 3종 다시 보고 있다. 김 과장도 보고 있다. 이 사원도.
근데 아무도 안 말한다.
“이 캐릭터가 뭘 해야 하는 캐릭터인지 모르겠어요.” 최 선임이 말했다.
뭘 해야 하는 캐릭터.
기획서엔 “중립 지역 NPC, 퀘스트 제공자” 라고 썼다. 그래서 친근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으로 그렸다.
“기획서대로 그렸는데요.” 내가 말했다.
“기획서는 맞는데 느낌이…”
또 느낌.
이 사원이 거들었다. “저도 뭔가 애매한 것 같아요.”
애매하다는 말. 이게 제일 듣기 싫다.
애매하면 뭐가 문제인지 말해줘. 컬러가 애매한가. 포즈가 애매한가. 표정이 애매한가.
“애매한 게 뭔가요?” 물었다.
“그냥… 전체적으로요.”
전체적으로.
리더의 판단
박 팀장이 정리했다. “일단 방향은 맞는 것 같아요.”
숨 쉬었다.
“근데 디테일 조정이 필요할 것 같네요.”
또 시작이다.
디테일 조정. 이게 3일인지 1주일인지 모른다. 어디를 얼마나 고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조정할까요?” 물었다.
팀장이 턱을 만졌다. 5초 지났다.
“일단 컬러 톤을 조금 더 밝게 가져가고요.”
메모했다. 컬러 톤 up.
“표정도 좀 더 친근하게.”
메모. 표정 보정.
“의상 디테일도 좀 더 심플하게.”
메모. 의상 단순화.
“전체적인 실루엣은 좋은데 포즈를 조금 더 다이나믹하게.”
메모 멈췄다.
심플하게 하면서 다이나믹하게? 이게 가능한가.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느낌상 그렇게” 라고 할 거다.
회의 끝
3시 50분. 20분 동안 결론.
“v4로 다시 가져오시죠.”
알았다고 했다.
회의실 나왔다. 다들 자리 돌아갔다. 나도 돌아왔다.
모니터 앞에 앉았다. 포토샵 켰다. NewChar_Concept_v3_final_real.psd 열었다.
레이어 76개. 42시간.
Ctrl+S. 다른 이름으로 저장. NewChar_Concept_v4_fix.psd
어디서부터 고칠까.
피드백 없음이 최악이다
결국 수정 방향 나왔다. 근데 찝찝하다.
회의실에서 20분 동안 침묵이 더 길었다. 구체적인 피드백은 5분.
나머지 15분은 “음…”, “그런데…”, “뭔가…” 였다.
이게 제일 힘들다.
차라리 “전부 다시 그려” 가 낫다. 명확하다. 뭘 해야 할지 안다.
“애매해요”, “느낌이 이상해요” 는 답이 없다. 내가 느낌을 맞춰야 하는데 그 느낌이 뭔지 모른다.
10번 고쳐도 “여전히 뭔가…” 라고 할 수 있다.
슬랙에 또 올렸다
4시 30분. v4 1차 수정 끝. 컬러 톤 올렸다. 표정 바꿨다. 의상 심플하게.
슬랙에 올렸다. “수정본 올렸습니다.”
10분 지났다. 읽음 5명. 댓글 0개.
또 시작이다.
박 팀장이 이모지 달았다. 눈 이모지 하나. 이게 좋다는 건지 “보긴 봤다” 는 건지 모르겠다.
5시 됐다. 아직도 댓글 없음.
내일 또 회의실 갈 것 같다. 그리고 또 “뭔가…” 들을 것 같다.
퇴근길
7시 10분. 퇴근했다.
지하철 탔다. 핸드폰 켰다. 슬랙 알림 하나.
박 팀장: “내일 오전에 다시 보죠.”
또.
이어폰 꽂았다. 음악 틀었다. 창밖 봤다.
어제 그린 팬아트 생각났다. 트위터에 올렸더니 좋아요 800개. “터치 미쳤다”, “색감 최고” 댓글 30개.
회사 일은 일주일 붙잡아도 “뭔가 애매” 인데. 집에서 3시간 그린 건 좋아요 800개.
뭐가 다른 걸까.
집 도착했다. 9시. 샤워하고 타블렛 켰다.
NewChar_Concept_v4_fix.psd 열었다.
또 고쳐야 한다. 어디를 어떻게 고칠지는 모른다.
내일 회의실에서 알려줄 것이다. “전체적인 느낌” 을.
침묵보다 무서운 건 “뭔가 애매한 것 같아요” 다.
